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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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강화유수부 정족산성 안에 두었던 사고(史庫).

개설

강화에 있던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는 원래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에서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3부를 더 출간한 후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처음 봉안한 곳은 마니산사고이다. 그러나 마니산사고의 구조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사진이 발견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 때 훼손된 데다가 1653년(효종 4) 11월 화재가 발생하여 『조선왕조실록』 2권 및 의궤와 여러 책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전등사(傅燈寺) 인근에 새로이 정족산사고가 건립되게 되었다.

정족산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1659년(현종 즉위) 선조의 외손자이자 강화유수였던 유심(柳淰)이 전등사 경내에 선원각(璿源閣)과 함께 건립을 시작하였다. 1660년 11월 8일 강화유수가 정족산성의 축성 공사가 완료되었음을 알리자, 현종은 마니산사고에 봉안되었던 『조선왕조실록』 등을 정족산성의 사고로 옮겨 봉안하고, 별장(別將)을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해 12월 3일에 『조선왕조실록』이 정족산사고에 옮겨졌다.

위치 및 용도

정족산사고는 전등사 경내 서쪽으로 해발 150미터 고지에 남향으로 선원각과 좌우로 건립되었다. 이와 별도로 서책의 포쇄(曝曬)를 위해 취향당(翠香堂)이 건립되었다.

변천 및 현황

조선전기의 『조선왕조실록』 중 임진왜란 중에 보존되었던 것은 전주사고본이 유일하였다. 경기전(慶基殿)참봉(參奉)오희길(吳希吉), 유생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 등은 일본군이 금산(錦山)에 침입했다는 말을 듣고 전주사고에 봉안된 『태조실록』부터 13대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조선왕조실록』과 기타 사고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를 정읍시 내장산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조정에서는 태인현, 익산군, 용안현, 임천군, 부여현, 정산현을 경유하여 아산현에 어진을 봉안하고, 해주에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하였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이후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기초로 1603년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2년 9개월 사이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조선왕조실록』을 활자로 출판했다. 이때 3부를 출간하여 전주본과 간행의 저본인 전주본 교정본의 5부를 춘추관사고와 외방 4사고의 5사고에 분장하였다.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원본은 강화 마니산사고에 보관하였는데, 사고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대파되었다. 이로 인해 현종 때 정족산성에 사고를 신축한 후 마니산사고의 서책을 옮기고 정족산사고라고 이름하였다(『현종개수실록』 1년 11월 8일).

정족산사고의 사각(史閣)은 조선말까지 존재하였으나 1918년과 1919년 사이에 철거되었고, 10여 개의 초석만 남아 있다가 1999년에 중건되었다. 정족산본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의 사각은 모두 2층 누각형의 건물인 데 비해 정족산사고의 건물은 단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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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국사편찬위원회 편, 『사고지(史庫址) 조사 보고서』, 국사편찬위원회, 1986.
  •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 연구』, 국학자료원, 1998.
  • 배현숙, 『조선 실록 연구 서설』, 태일사, 2002.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7.
  • 정구복, 「조선초기의 춘추관과 실록편찬」『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일조각, 1992.
  • 한우근, 「조선 전기 사관과 실록 편찬에 관한 연구」,『진단학보』66,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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