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정문(明政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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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의 정문.

개설

조선초기에는 왕위를 이어받은 왕과 대비가 함께 기거한 일이 없었다. 선왕이 승하하기 전에 대개는 자신의 아들인 다음 왕에게 선위하고 자신은 상왕(上王)이 되어, 대비(大妃)의 위계에 오른 왕비와 함께 궁궐 밖에 따로 별궁을 정해 나가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초기에는 왕비가 먼저 승하했더라도 다시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성종 이전까지는 왕이 임어한 시어처(侍御處)에 대비가 함께 머문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성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왕실에는 갑자기 3명의 대비가 존재하였고 대비들이 거처할 만한, 위계에 맞는 전각을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이 지속되는 상황이 생겼다. 성종은 대비를 위한 새로운 궁궐을 모색하였고, 대비는 무릇 동조라는 이름으로 동쪽에 거해야 한다는 규례를 따라 창덕궁의 동쪽에 창경궁을 마련하였다. 이때 정전을 비롯하여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이 모두 동쪽을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궁궐이 지어졌다(『성종실록』 15년 10월 11일).

위치 및 용도

창경궁은 창덕궁의 동쪽에 연접해 창덕궁의 모자란 공간을 채웠다. 따라서 이 두 궁궐을 아울러 하나의 궁궐처럼 동궐이라 불렀다. 동쪽 끝에는 창경궁을 지키는 홍화문이, 양쪽에 궐로 상징되는 남과 북의 십자각을 끼고 서 있다. 홍화문의 안쪽에는 행각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마당이 조성되었는데 이 마당을 가로질러 금천이 흘렀다. 금천을 건너는 다리가 옥천교인데 다리를 건너면 정면에 보이는 장대한 문이 명정문이다. 명정문의 안쪽에는 박석을 깐 마당이 있고 두 단의 월대 위에 명정전이 서 있다.

명정문은 중앙의 관원들이 궁궐로 들어와 왕에게 문안하고 조회를 하는 조참의 의례가 가장 많이 일어난 장소이다. 조참 외에도 죄지은 자들을 국문하는 국청이 마련되기도 했다. 또한 오례의 의례가 있을 때 의례를 거행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신하들과 인견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예정되지 않은 백성들과 만나 시류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또한 제신들과 유생들의 시험을 보는 과장이 되기도 하였고, 정사를 내려놓은 노신들을 사은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명정문은 궁궐 정전의 정문답게 많은 역할과 소용이 있는 공간이었다.

변천 및 현황

명정문은 명정전의 권역으로 조정의 마당을 둘러싼 행각 중 동행각에 있는 문이다. 1484년(성종 15)에 건립되었고, 100여 년이 지난 임진왜란 당시에 창경궁 대부분의 전각과 함께 불에 타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중건 역사를 일으켜 복구하였다. 일제강점기가 되었을 때 창경궁은 궁궐로서는 겪지 말아야 할 수모를 겪었다. 왕실의 집이며 한 나라의 정사가 모이는 궁궐이건만 창경궁이 아닌 창경원으로 이름이 바뀌며 궁궐의 면모를 잃어버린 놀이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창경원으로 이름 지은 이곳에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가득 채워 심었고 식물원은 물론 동물원, 놀이기구들이 들어서며 대부분의 전각이 훼철되었다. 이때 명정문의 권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명정문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행각의 일부가 헐려 나갔다. 그나마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이 화를 피해 조선중기의 건축물을 보여준다.

1950년대에 한국전쟁으로 문을 닫았던 창경원이 다시 문을 열며 이 시기 서울시의 행락객들에게 인기 높은 장소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986년부터 창경궁의 복원 계획을 마련하여 동물원, 장서각 등을 과천과 성남 등지로 이전하였고 이때부터 창경궁 내 주요 건물의 원형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지금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정비된 명정문과 명정전의 일곽을 볼 수 있다. 다행히 명정문은 그간의 수많은 사건 사고 속에서도 화를 면해 광해군 때 중건된 문이 그대로 보존되어 궁궐의 전문(殿門) 가운데 가장 오랜 연한을 간직한 문으로 보물 제385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명정문은 홍화문부터 이어진 어도가 문 앞, 정면 중앙에 놓여 있다. 지대석을 깔고 4벌대의 장대석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조성된 높은 기단 위에 문이 놓여 있으며 기단의 앞에는 3부분으로 나뉜 폭이 너른 계단이 어도가 끝나는 지점부터 놓여 있다. 명정문은 문의 좌우에 연접하여 놓인 행각보다는 지붕의 높이가 높게 형성되었지만 문은 평삼문의 형식을 취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조성되었다. 3칸의 문은 각각 원기둥이 문의 위용을 장대하게 만들어준다. 각 3칸의 문은 거의 비슷한 너비이나 중앙 어칸이 양쪽 좌우의 협칸보다 30㎝가량 넓은 480㎝ 정도의 폭으로 구성되었다.

문짝은 주칠을 한 2짝의 판장문이 각각의 문에 설치되었고 다포식의 공포가 지붕을 받치고 있다. 천장은 서까래의 구조가 보이는 연등천장이고 문인방 위에는 안상의 모양대로 풍혈을 뚫은 3개의 궁판을 끼우고 그 위에 홍살을 설치했다. 가구의 부재에는 모로 단청으로 칠하여 멋을 내어둔 덕에 정전문의 위용과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낼 수 있었다.

지붕부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로 장식하였고 내림마루의 끝에는 용두가, 추녀마루 위에는 5개씩의 잡상이 올라 앉아 있다. 명정문은 전체적으로 정전의 정문다운 면모를 드러내는 장대한 문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65년(명종 20)에 왕의 환후가 심상치 않았다.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는 2년 전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였고 후사가 없어 왕실의 걱정을 자아내고 있었다. 조정은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차도를 보이지 않는 왕의 병세에 불안하고 소란할 수밖에 없었다.

1565년 9월 17일에 왕이 차도를 보이지 않자 대신들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을 왕의 시약하는 사람으로 삼자고 하며 중전인 인순왕후를 압박하였다. 왕이 운명을 다투는 때에 시약하는 사람이란 다음 보위를 이어갈 사왕(嗣王)과 관계되는 사람으로, 대신들은 이균을 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인물로 지목하며 중전을 강하게 다그치는 것이었다. 인순왕후는 갈팡질팡하며 마음을 정하지 못했지만 왕의 환후를 걱정하며, 이런 상황에 그같이 중요한 일을 아뢰는 것은 왕의 마음을 어지럽혀 병세를 악화시킬 수 있으니 옳지 않은 일이라며 대신들의 간언을 뒷전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중전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대신들은 다음 날도 중전을 찾은 듯하다. 이틀 뒤인 9월 19일 기사에 의하면, 왕의 환후가 회복되어간다는 의관의 전언이 있었는데도 대신들은 명정문 앞 외정에 모여 중전에게 언서로 앞일을 다짐받고 있었다. 후사를 정하는 일을 중전이 직접 이름을 써 내려주었으니 다시 고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중전의 답을 받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더해 왕의 환후가 차도를 보이니 조용할 때에 정한 후사를 왕에게 고하고 허락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중전은 대신들의 기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지난번에는 미령하신 옥체가 낫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그만, 말끝에 이름을 언급했을지 모르지만 왕의 기력이 좋아지시니 독단할 수 없다며 약속을 거두려 애썼다. 그 후 왕은 회복되었고 2년여를 더 생존한 후에 승하하였다. 결국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이 명종 승하 후에 사왕이 되었는데, 그가 훗날의 선조이다(『명종실록』 20년 9월 19일).

1755년(영조 31)에 왕이 명정문에 나아가 느닷없이 계획에도 없던 일을 경조 당상관에게 명하였다. 오늘 당장 시골 사람인데 서울에 들어와 머물고 있는 자들을 찾아내어 궁궐로 불러들이라는 것이었다. 당상관이 급히 나가 알아보니 때마침 서울에 머물고 있는 시골 사람이 60명에 달했다. 그들을 명정문 앞으로 불러들였고 왕도 명정문 앞에 나아가 시골 사람들을 만났다. 왕은 시골은 비가 제때에 잘 오는지, 보리농사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농사가 풍년일지 흉년일지를 물어보았다. 촌로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직접 백성들에게 이르는 말을 공포하게 하고 백성들의 가여운 사정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영조실록』 32년 4월 17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궁궐지(宮闕志)』
  • 『홍재전서(弘齋全書)』
  • 문화재청 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 문화재청 편, 「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 정밀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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