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유재(大猷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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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창덕궁 안 규장각의 부속 건물 중 하나.

개설

대유재는 조선후기 규장각(奎章閣)의 부속 건물로, 국왕과 신하들이 재숙(齋宿)하던 공간이었다. 순종 이후 규장각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대유재는 검서청(檢書廳)으로 바뀌었다. 연못가에 지어진 정자의 형태로 만들어진 특이한 모습을 갖고 있다.

위치 및 용도

대유재는 창덕궁규장각 안쪽의 북쪽 편에 있던 부속 건물이었다. 규장각 안쪽의 동쪽에는 소유재(小猷齋)가 있었다. 대유재는 본래 국왕과 신하들이 재숙하던 곳으로, 국왕이 선왕의 어진을 봉안한 선원전(璿源殿)대보단(大報壇)전배(展拜)할 때에 전날 밤을 규장각에서 재숙하였는데, 이때 대유재는 국왕이 머무는 어재실(御齋室)로 사용되었다. 1857년(철종 8)에는 연경당(演慶堂)에 습기가 차자 그곳에 있던 선왕들의 어제(御製)와 어필(御筆) 등을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고종대 후반 대유재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국왕이 신하들을 소견하는 장소로 활용되거나(『고종실록』 34년 2월 21일),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도 활용되어 신하들의 진하(陳賀)를 받거나(『고종실록』 34년 2월 26일), 제사에 쓰일 향과 축문을 전하거나(『고종실록』 34년 5월 17일), 국상이 있을 때 망곡(望哭)을 행하고 복을 입는 거애(擧哀) 장소(『고종실록』 35년 1월 8일) 등으로 활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대유재는 본래 이문원(摛文院)의 부속 건물로서, 이문원은 1781년(정조 5)부터 규장각 각신들이 숙직하던 곳이다. 대유재는 정조대 이전에 만들어졌으나 따로 이름이 없어, 정조의 명에 따라 유득공(柳得恭)이 지은 것이다. 이문원은 나중에는 규장각으로 명명되었는데, 이로써 대유재는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 순종대 이후 규장각의 기능이 도서관으로 변모하면서 대유재는 검서청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주위에 여러 곳의 서고가 새로 만들어졌다.

형태

대유재는 창덕궁의 금천(禁川) 중앙까지 뻗어 나온 건물의 오른 편을 기둥이 떠받들고 있는 형태로, 연못가에 지어진 정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대유재에는 오래된 전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나무 그늘에 10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전나무는 본래 유희경(劉希慶)의 정원에 있던 것이었으나, 궁궐의 서쪽 담장을 새롭게 조성하면서 궁궐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궁궐지(宮闕志)』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한경지략(漢京識略)』
  • 한영우,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열화당,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