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평악(運平樂)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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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운평악 |
한글표제 | 운평악 |
한자표제 | 運平樂 |
상위어 | 장악원(掌樂院) |
분야 | 문화/예술/음악 |
유형 | 의식·행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전기 |
왕대 | 조선전기 |
집필자 | 이정희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운평악(運平樂)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연산군일기』 10년 12월 24일, 『연산군일기』 11년 1월 15일, 『연산군일기』 11년 2월 24일, 『중종실록』 1년 9월 3일, 『연산군일기』 11년 3월 12일, 『연산군일기』 11년 11월 27일, 『연산군일기』 11년 1월 4일, 『연산군일기』 11년 6월 16일, 『연산군일기』 11년 7월 20일, 『연산군일기』 11년 3월 25일 |
연산군대 궁중에 설치되어 악(樂)·가(歌)·무(舞)를 연행했던 음악 기구의 하나.
개설
운평악(運平樂)은 연산군이 신설한 궁중음악 기구의 하나이자, 이 기구 소속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연산군의 향락을 위해 존속하였다가 중종이 왕위에 오른 후 폐지되었다. 운평악에 뽑혀온 자들은 장악원의 악사에게 악기, 노래, 춤을 교육받았고, 궁궐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왕의 명령에 따라 입궐하여 기예를 선보였다.
연원 및 변천
운평악은 연산군의 명령으로 설치되었다. 여러 고을에서 재주와 미색이 뛰어난 자들을 뽑아 구성하였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났던 기녀들로 구성되었던 흥청악보다는 서열이 낮았다. 처음에는 700명 정원이었다가(『연산군일기』 10년 12월 24일) 그 수가 점차 늘어 1,000명으로 증원되었다(『연산군일기』 11년 1월 15일), (『연산군일기』 11년 2월 24일). 중종이 즉위한 후 운평악에 속했던 이들은 석방되었다(『중종실록』 1년 9월 3일). 다만 흥청악에 속했던 이들은 일부는 바로 석방되었으나 일부는 왕실 재물에 대한 추심 절차 등을 거친 뒤에 벌을 주거나 석방하도록 하였다.
절차 및 내용
운평악은 재주와 품격에 따라 3등으로 나뉘었다(『연산군일기』 11년 3월 12일). 이들은 패(牌)에 이름·나이·본관을 새겨 차고 다녔다(『연산군일기』 11년 11월 27일). 그 겉옷의 모양은 흥청악이 입는 아상복과 같았지만 흰 명주로 만들어, 중국에서 수입한 오색 모시로 만든 흥청악의 아상복과 옷감 종류에서 차별화되었다(『연산군일기』 11년 1월 4일).
그들은 용모 치장과 기예 연습에 힘썼다. 그 복장과 화장이 정결하지 못할 때는 장악원의 제조와 관원이 국문(鞠問)을 당했고(『연산군일기』 11년 6월 16일),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할 경우에도 그들을 지도한 장악원 관원이 벌을 받았다(『연산군일기』 11년 7월 20일). 운평악 중 기예와 미모가 뛰어난 이들은 흥청악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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