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석(燈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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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초파일의 연등 행사.

개설

음력 4월 8일 온갖 등을 켜서 석가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관등절(觀燈節)을 말한다. 당시에는 등석을 위해 관청과 시장가까지 등불을 단 장대[燈竿]를 세워, 등을 많이 달 때는 10개에서 적게는 3~4개를 달기도 하였다. 이날은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연원 및 변천

등석은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오던 행사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음력 정월 대보름날인 상원(上元)에 온 나라가 이틀 동안 연등(燃燈)을 길게 늘어뜨리는 장등(長燈)의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상원에 관등을 행하였으나 후기에 들어 초파일로 그 행사가 변경되었다. 1245년(고려 고종 32)에 최이(崔怡)가 4월 8일로 옮기면서 상원의 등석은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초파일의 연등행사는 최이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등석에는 상원과 마찬가지로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였는데,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의하면 1년 중 상원과 초파일에 한양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붐빈다고 하였다. 그로 인해 등석에 술에 취해 싸움이 벌어지는 등의 폐해가 나타나기도 하였다(『현종실록』 3년 4월 25일).

초파일의 관등행사는 매년 행하였지만 왕의 건강 상태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1766년(영조 42)에 3월부터 왕의 위장염으로 인해 등석의 관등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초파일에 가까워 병세가 호조를 보이자 초파일 전날 전례대로 등석의 관등을 준비하라 하였다(『영조실록』 42년 4월 7일).)

절차 및 내용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등의 종류는 수십 가지가 넘었다. 그 형태에 따라 연꽃등·칠성등·일월등·배등[船燈]·종동(鍾燈)·누각등·잉어등·거북등·자라등·수복등(壽福燈)·태평등·만세등(萬歲燈)이라 불렸으며, 각각의 형태에 따라 상징하는 의미가 달랐다.

등은 종이나 비단으로 그 외형을 만들었다. 그 겉면에 날아가는 신선이나 선녀가 학이나 사자 그리고 거북이나 자라 등과 같은 영물을 타고 있는 모습이나 꽃과 새를 그려 넣기도 하였다. 이러한 등은 가정에서 손수 만들기도 하였지만 시내에서 판매하기도 하였는데 그 값이 비쌌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모양의 등은 등간(燈竿)에 달아 세웠다. 조선후기에는 등을 자녀 수대로 켜고 밝혀야 길하다고 여겼다. 등간 위에는 꿩의 깃을 꽂아 길상을 표시하고 울긋불긋한 천을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민간에서는 초파일에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거나 산에 가서 산신에게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산신에게는 주로 가족의 건강과 가내의 평안을 빌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경도잡지(京都雜誌)』
  • 『계곡집(谿谷集)』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삼국·고려시대편』, 20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신문·잡지편(1876~1945)』, 20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전기 문집편』, 2004.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후기 문집편』, 2005.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현대신문편(1946~1970)』, 2006.
  • 김용덕, 『한국 불교민속문화의 현장론적 고찰』, 민속원, 2014.
  • 임동권, 『한국 세시풍속 연구』, 집문당, 1984.
  • 편무영, 『한국 불교민속론』, 민속원, 1998.
  • 홍윤식, 『불교와 민속』, 동국대학교출판부, 2012.
  • 김명자, 「한국 세시풍속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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