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徙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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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이 들거나 국상을 당하여 저자를 옮기는 일.

개설

사시(徙市)는 이시(移市) 또는 항시(巷市)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신라 때부터 농사철에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내고 장터를 옮겼다. 국상이 나도 저자를 길거리로 옮겼다. 상인들은 저자를 닫고, 서민들을 위해 일용품 등에 한하여 거리에서 사고팔게 한 것이다.

연원 및 변천

『예기』 「사시조(徙市條)」에 “천자가 죽으면 7일 동안 항시하고, 제후가 죽으면 3일 동안 항시하니, 사시하는 것도 옳지 않겠는가[天子崩 巷市七日, 諸侯薨 巷市三日, 爲之徙市 不亦可乎]”라고 하였다. “주(註)에 이르기를 사시, 또는 항시라는 것은 교역 물건을 항(巷)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는 서민들이 나라의 큰 상사(喪事)에 슬픔을 표하여 저자를 파하였지만 일용 필수품은 거래가 되어야 하므로 거리로 저자를 옮기는 것이다[註言 徙市又巷市者 徙交易之物於巷也. 此庶人爲國之大喪 憂戚罷市 而日用所需 又不可缺, 故徙市於巷也]”라고 하였다.

『후한서』「낭의전(郞顗傳)」에 “가뭄이 들면 산천과 지렁이에 제사하고 이시한다[薦祭山川暴龍移市]” 하였는데 이는 사시와 같은 뜻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628년(신라 진평왕 50) 큰 가뭄이 들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를 기원했다.

고려나 조선에서도 가뭄이 심하게 들면 시장을 옮겼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고려사』에는 “오래 비가 오지 않아 사시하였다[以久旱徙市]”든가, “비를 기원하기 위해 단선하고 사시하였다[禱雨斷扇徙市]”라고 하였다. 단선은 햇볕을 가리는 산선(繖扇)을 거두었다는 뜻이다. 조선에서도 1396년(태조 5) 가뭄 때문에 저자를 옮겼다고 하였다.(『태조실록』 5년 4월 17일) 또한 1448년(세종 30)에는 예조에서 무당과 중을 불러 비를 빌고 시장을 옮기며 다섯 방위의 토룡(土龍), 즉 지렁이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왕에서 아뢰었다.(『세종실록』 30년 5월 1일) 『사문류취』에 의하면 지렁이는 비를 내리게 한다고 한다.

1454년(단종 2)에는 왕이 예조에 전지(傳旨)하여 가뭄이 심하니 남문은 닫고 북문을 열어 두며, 사시하게 하고, 무당을 모아 비를 빌도록 하였다.(『단종실록』 2년 7월 17일) 조선초기와 달리 중기 이후로는 비를 기원할 때 무격 행사나 불사는 행하지 않았지만 사시는 여전히 시행하였다. 1471년(성종 2) 예조에서 사시하고 숭례문을 닫게 하며 격고(擊鼓)하지 말라고 청하였지만 이전과 달리 무격 행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성종실록』 2년 6월 2일)

기우의 경우에 비해 국상 때 사시를 행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국조오례의』의 「흉례의식」 계령(戒令)에 국상이 나면 5일간 항시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영조 때 기사를 보면 이에 관한 그간의 전례가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728년(영조 4) 11월 16일 왕세자가 창경궁 진수당(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이틀 후 예조에서 을유년, 즉 1645년(인조 23)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았으나 항시에 관하여 나타난 글이 없어서 무술년, 즉 1718년(숙종 44)의 전례에 따라 5일 동안 조시를 정지할 뜻을 아뢰었다.

절차 및 내용

가뭄이 심하면 산선으로 햇볕을 가리는 일을 그만두고, 도살을 금하고, 도랑[溝渠]을 소제하고, 사시하는 것은 고려 이래로 조선에까지 이어진 관행이었다. 또한 조선초기에는 이러한 일과 더불어 우사단(雩祀壇)과 원단(圓壇)에 제사를 지내 비를 빌고, 드러난 뼈를 덮어 주고, 짐승의 뼈를 묻어 주라는 명을 내렸다. 철주(輟酒), 즉 근신하는 의미에서 왕이 금주를 하고 감선(減膳), 즉 수랏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였으며, 전렵(田獵)을 금하였다. 의정부에 명하여 형조로 하여금 가벼운 죄는 용서하거나 면제하고 무거운 죄는 결단하게 하게 한 것도 가뭄이 심각할 때 내려진 조처였다.

생활ㆍ민속적 관련 사항

가뭄이 들어 사시를 할 때 서울 장안에서는 점포를 닫고 거리로 나오는 항시를 하지만, 지방에서는 장을 강가 또는 평소 물에 잠겨 있는 곳으로 옮겼다. 즉 시끄러운 시장을 물 가까이 둠으로써 잠자는 용을 깨워 비를 내리게 하려는 주술적인 의미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