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보공재(祈雨報供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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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법석을 연 뒤 비가 내린 경우에, 불은(佛恩)에 보답하기 위해 올리는 공양과 재.

개설

기우보공재(祈雨報供齋)는 기우법석을 연 뒤 비가 내리면 부처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올린 재로, 유교의 보사제(報祀祭)와 유사하다. 조선 태종대에는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오면 주로 보사제를 지냈고, 불교식 보공재를 올린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해 세종대에는 보사제와 보공재가 번갈아 설행되었으며, 그 둘이 동시에 시행되는 경우도 잦았다. 조선시대에 보공재는 흥천사에서 주로 설행되었으며, 문종대 이후에는 설행된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연원 및 변천

세종은 재위 중반 이후 불교에 심취하면서 불사(佛事)를 자주 일으켜 신하들과 마찰을 빚었다. 특히 1449년(세종 31)에는 기우법석을 행하고 비가 내린 뒤 보답으로 공양을 올리는 보공재를 항식(恒式)으로 정하면서 신하들과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이때 의정부에서는 예전에 듣지 못한 의례라며 그만둘 것을 청하였는데, 이는 보공재가 예전에는 치러진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공재는 조선조 특유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일종의 연종환원(年終還願)과 같다고 주장하며 보공재를 강행하였다. 연종환원은 연말에 왕실에서 내시별감(內侍別監)을 보내어 사찰과 산천에서 왕의 복을 빌던 의식으로, 1421년(세종 3) 12월에 폐지되었는데, 세종은 보공재가 연종환원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세종실록』 31년 6월 12일). 세종은 또 보공재가 농사를 위한 것이므로 열 번을 치른다 해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세종실록』 31년 6월 14일). 그뿐 아니라 사간원에서 "종묘와 사직, 산천에 모두 기우제를 지낸 뒤 아직 보사제를 올리지도 못했는데, 이보다 먼저 보공재를 지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아뢰었으나, 세종은 "보공재는 다른 제사와 다르다."고 주장하며 설행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31년 6월 16일).

이러한 상황은 문종 연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451년(문종 1) 5월에 문종이 기우보공재를 설행하려 하자 우헌납(右獻納)고태필(高台弼)이 경연(經筵)에서, 사직과 종묘에 기도한 뒤에 비가 내렸으니 비가 내린 공로를 부처에게만 돌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보공재를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문종은 보공재가 예부터 전해오는 예법이라는 이유를 들어 예정대로 보공재를 설행하였다(『문종실록』 1년 5월 25일).

절차 및 내용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부처와 승려들에게 공양과 재를 올리는 것을 공불재승(供佛齋僧), 공불반승(供佛飯僧), 반불공승(飯佛供僧)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해 불공 또는 재공, 공양 의식이라고도 한다. 기우보공재 역시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고 승려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공양 의식에 의거해 설행되었다.

공양 의식은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는 작법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보공재는 비를 내려 준 신불에게 보답하는 재이므로, 유치(由致)에서 불공을 여는 까닭을 밝히고 공양을 올린다. 신불(神佛)에게 공양을 올린 뒤에는 승려들에게 음식을 베푼다.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반승이라고 하는데, 반승은 보공재뿐 아니라 소재초복(消災招福)을 목적으로 하는 각종 불사에서 반드시 행해졌다.

한편 보공재에서는 승려들이 불교를 강의하는 법석(法席)이 열리지 않았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보공재는 재(齋)가 중심이 된 의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작법절차(作法節次)』
  • 서윤길, 『한국밀교사상사』, 운주사, 2006.
  • 김용조, 「조선전기의 국행기양불사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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