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첩시(春帖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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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에 대궐의 기둥에 써 붙이던 춘련(春聯)의 시구.

개설

입춘의 상서로움을 맞이하여 문관에게 하례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 이를 대궐의 기둥에 붙이는 것을 춘련(春聯)이라 한다. 입춘첩시(立春帖詩), 춘첩(春帖), 춘첩자(春帖子), 춘첩영상시(春帖迎祥詩)라 불리기도 한다. 춘첩시는 봄을 축하한다고 해서 춘축(春祝)이라고도 한다.

연원 및 변천

춘첩시는 중국에서 유래된 풍속이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춘련은 입춘에 봄에 맞는 문자를 써서 문에다 붙인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학식이 뛰어난 문관이 윤음(綸音)과 시(詩)를 내리면 이를 바탕으로 시를 지었다. 특히 문관 중에서도 승정원의 제술관(製述官) 중에서 뽑아 시를 짓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이 김감(金勘)에게 승정원의 제술관을 뽑아 춘첩시를 짓게 하고, 이들에게 영상시(迎祥詩)도 짓도록 전교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12월 23일). 조선시대에 영상시는 대체로 제술관이 지었으므로, 춘첩시 또한 주로 제술관이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첩시는 문관뿐 아니라 왕이나 왕세자가 직접 짓기도 하였다.

춘첩은 상(喪)이 있을 때는 일시적으로 중지하였다. 1635년(인조 13)과 1815년(순조 15)에 국상으로 인해 연례 행사인 춘첩영상시를 중지하였다(『인조실록』 13년 12월 23일)(『순조실록』 15년 12월 24일). 조선시대에는 국상이 아니더라도 춘첩시 바치는 것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1767년(영조 43)에 춘첩자와 연상시를 그만둘 것을 명하기도 하였으나(『영조실록』 43년 11월 26일), 이후에도 이 행사는 계속되었다.

절차 및 내용

춘첩시의 내용은 다양하였다. 주로 나라의 평안과 세시(歲時)와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춘첩시를 짓지 못한 경우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을 써 붙이기도 하였다.

관상감(觀象監)에서는 붉은색의 주사를 이용하여 벽사문의 춘첩을 써서 대궐 안으로 올리면 그것을 문설주에 붙이는데, 단오에도 이것을 붙였다. 이는 단오첩(端午帖)이라 하였다. 춘첩시의 내용으로 나례(儺禮) 때 역귀를 쫓는 축언을 쓰기도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궁궐 외에 경상대부와 일반 민가 및 상점에서도 기둥이나 문설주에 춘련을 붙이고 봄을 축하하였다. 민가에서는 주로 대치가 되는 내용의 대련(對聯)을 많이 쓰고, 또한 문이나 문설주에는 단첩(單帖)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과 같은 문구를 써서 붙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도잡지(京都雜誌)』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일성록(日省錄)』
  •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전기 문집편』, 2004.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조선후기 문집편』, 2005.
  • 이두현 외, 『한국 민속학 개설』, 일조각, 1994.
  • 임동권, 『한국 세시풍속 연구』, 집문당,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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