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례(大儺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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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궁중과 민간에서 행하는 악귀를 쫓는 의례.

개설

대나(大儺) 혹은 나례(儺禮)라 불리기도 한다. 섣달[季冬] 마지막 날에 궁궐과 민가에서 사신(邪神)과 역질(疫疾)을 쫓는 의식이라는 점에서,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라 불리기도 한다. 계동은 28수의 별자리 중 허수[虛宿]와 위수[危宿]를 지나는 시기이며, 이때 대나와 희생제의와 같은 의식을 행함으로써 재앙과 질병을 물리쳤다.

연원 및 변천

대나의 연원은 중국의 주(周)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논어(論語)』에서 ‘공자(孔子)가 시골 사람들이 나례를 행할 때에 조복(朝服)을 입고 섬돌에 서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볼 때, 대나례는 이미 주(周)나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영조실록』 35년 12월 26일).

대나례는 중국에서 처음 시작되었지만, 연행 시기에는 차이를 보인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후한서(後漢書)』「예의지(禮儀志)」를 인용하여, 납일(臘日) 전날에 대대적인 나례를 하여 전염병을 옮기는 역질 귀신을 쫓을 때 등장하는 인물 중의 하나인 진자(侲子)의 대사가 서술되어 있다. 이것이 훗날 입춘의 부적이 된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대나의식이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행해진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납일은 시기마다 달리 날이 정해졌다. 고려시대에는 대한(大寒) 후 진일(辰日)이었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동지(冬至) 후 첫 번째 미일(未日)을 납일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납일은 연말에 가까운 날이기는 하나,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대나례는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행했으며, 이는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통해, 중국과 달리 고려와 조선은 납일이 아닌 섣달 그믐날 이 의식을 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행해지는 대나례는 축귀 의식 외에 잡희(雜戲)로서 연행되기도 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1040년(고려 정종 6)에 악귀를 쫓는 의미 외에도 칙사(勅使)의 영접, 왕의 거둥, 감사(監司)의 영접 등과 같이 궁중 연향(宴享)에 일종의 공연으로서 배우의 노래와 춤을 곁들인 유희로 전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의 주도하에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연행되었다. 1637년(인조 15)에는 병자호란 뒤에 재정 궁핍의 이유로 나례가 잠시 중단되었으나 1692년(숙종 18)에 복구되었다. 숙종은 『주례(周禮)』의 장몽(掌夢)을 고찰하고 관상감에게 『오례의(五禮儀)』에 근거하여 이전의 제도대로 대나례를 복구하도록 하였다. 이때 대나례를 복구하면서 비용 절감을 위해 역귀를 쫓는 역할을 하는 방상씨(方相氏)의 가면은 나무 대신 종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숙종실록』 18년 12월 18일).

대나례 의식은 1759년(영조 35)에 경신일 풍속과 함께 또 다시 폐지되었다(『영조실록』 35년 12월 26일). 하지만 1849년(헌종 15)에 홍석모(洪錫謨)가 집필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제석에 연종포(年終砲)와 불화살[火箭]을 쏘고 징과 북을 울리는 것은 대나 행사에서 귀신을 쫓던 풍습이 남은 것이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조대에 폐지된 대나례 의식은 이후에 축귀의식(逐鬼儀式)의 일부만이 남아 제석의 연례행사로 행해졌던 듯하다.

절차 및 내용

섣달은 허수와 위수가 지나 음기가 강해지는 시기로 인식된다. 허수와 위수는 재앙과 불운 그리고 죽음을 가져다주는 별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시기에 대나의식과 희생(犧牲)을 신에게 바쳐 음기를 제거하는 방책(旁磔)을 행하여 재앙과 질병을 물리쳤다. 대나례가 행해졌던 이유도 그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대나례는 관상감의 주도로 연행되었다. 그 의례 내용을 살펴보면, 서울 사대문 안인 광화문(光化門) 및 흥인문(興仁門)·숭례문(崇禮門)·돈의문(敦義門)·숙정문(肅靖門)에서 행하였다. 나례의 행렬은 4대(隊)로 나누는데, 대마다 각각 방상씨가 1인, 진자(侲子)가 12인, 집편(執鞭)이 5인, 노래 부르는 이[唱帥]·몽둥이를 든 이[執棒]·징 연주자[執錚]·북연주자[執鼓]·피리(吹笛) 연주자 각각 1인으로 구성된다. 매 대마다 횃불[炬]을 가진 10인이 앞에서 행진한다.

대나의 시작은 관상감이 역귀를 몰아내는 나자(儺者)를 거느리고 새벽에 근정전(勤政殿) 문 밖으로 나가면 승지가 역귀(疫鬼)를 쫓을 것을 고한 뒤에 궐 안의 한 사람이 선창하면 다른 사람이 따라 대답한다. 그리고 요란하게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횃불 행렬이 함께 광화문으로, 사대문 밖으로 몰아내었다. 제는 먼저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이 돗자리를 깔아 놓으면, 제관과 관원이 북향하고 있다가 재배한 뒤에 술을 올리고 축문을 읽은 뒤 다시 재배하면 나자가 나올 무렵에 수탉[雄鷄]을 잡고 술을 부어 제사를 마친 뒤 제물을 땅에 묻는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대나례에서는 연종포와 불화살을 쏘고 폭죽을 터뜨렸는데 이는 귀신을 놀라게 해 역질을 쫓기 위해서라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민간에서도 궁중의 대나를 모방하여 유사한 의례가 연행되기도 하였다. 민간의 대나의식은 이색(李穡)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잘 설명되어 있다. 『용재총화』에 의하면 여러 나뭇가지와 줄기로 만든 액막이 빗자루[帚]와 북과 방울을 가지고 창문과 문지방을 두드리면서 매구[枚鬼]를 쫓아내자고 말하며 문 밖으로 쫓는 시늉을 한다. 이때 사용된 액막이용 빗자루는 푸른 댓잎과 박태기나무[紫荊] 가지, 익모초 줄기, 그리고 동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합하여 만들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도잡지(京都雜誌)』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 『지봉유설(芝峯類說)』
  • 『후한서(後漢書)』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자료집성: 삼국·고려시대편』, 2003.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자료집성: 조선전기 문집편』, 2004.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 세시풍속자료집성: 조선후기 문집편』, 2005.
  • 이두현 외, 『한국 민속학 개설』, 일조각, 1996.
  • 임동권, 『한국 세시풍속 연구』, 집문당,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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