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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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서원(書院)과 비교되는 제향 기관.

개설

사우는 서원과 비교되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사회 기구로서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 제향하는 곳을 사우라고 부른다. 이 경우 사우 외에도 향현사(鄕賢祠)·영당(影堂)·별묘(別廟)·생사당(生祠堂)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내용 및 특징

서원과 함께 조선후기에 발달한 사우는 선조와 선현의 숭배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사우의 선행 형태는 삼국·고려시대에도 존재했는데 예컨대 삼국시대 왕실의 시조묘라든가, 고려시대 성황사라고 불렸던 지역 인물의 제향 전통이 그러한 것들이었다. 고려 말 주자학 수용과 함께 가묘(家廟) 제도가 성립되면서 사우가 정착·발전하였다.

조선 초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보이는 최초의 사우 기록은 1410년(태종 10) 사간원이 시무책에서 문익점(文益漸)의 향리에 사당 건립을 청하는 사례에서 나타난다(『태종실록』 10년 4월 8일). 1419년(세종 1)에는 세종이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기자(箕子)의 비문을 짓게 하고 비석을 사우에 세우게 하였다(『세종실록』 1년 2월 25일). 그 후 세종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시조를 모실 의사(義祠)를 세우라고 하명하기도 하고, 소경공(昭頃公) 종(褈)의 사우를 지어 주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문종대에는 고려 왕씨의 사우를 건립한 기사가 보이며(『문종실록』 2년 3월 18일), 성종대에는 길재(吉再)의 학덕을 기려 그의 고향인 선산에 관찰사남재(南在)가 길재사(吉再祠)를 건립하였다.

한편 사우의 또 다른 형태는 산천신에 대한 제사처로서의 사묘가 있는데, 세조 때 집현전직제학양성지(梁誠之)가 상소로 명산대천에 사묘를 건립하도록 하고 있다(『세조실록』 2년 3월 28일).

사우 건립이 본격화되는 것은 조선중기 이후 서원이 발흥하면서부터였다.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안향(安珦)의 옛 집터에 사우를 세워 봄·가을에 제사하고 이름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한 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로, 당시의 서원은 사당 사우로 출발하였다(『중종실록』 36년 5월 22일). 이는 정몽주(鄭夢周)를 제향한 임고서원(臨皐書院)도 마찬가지였다.

서원과 사우는 그 태동에서 건립 목적과 기능이 구별되었다. 서원은 인재 양성과 강학(講學)에 목적을 두고 사족의 독서처와 강학소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현과 선사에 대한 제향 의식은 이차적이며 부수적이었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사우는 충절인이나 지방에서 공이 있는 인물, 그리고 조상의 공덕을 기리는 보본숭현(報本崇賢) 사상에서 비롯되었으며 사현(祀賢)을 통한 향촌민의 교화에 일차적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원과 사우는 향사인(鄕祀人)의 성격에서도 차이가 있었는데 사우에 제향되는 인물은 행의(行誼)와 충절, 효열(孝烈)이 그 마을에서 존숭 받을 만한 인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서원에 향사되는 인물은 도덕과 학문으로 저명한 도학연원(道學淵源)·학문종사(學問宗師)·공적위국(功績爲國) 등의 문신 학자들이었다.

조선중기 이후 『조선왕조실록』의 사우 기사는 대부분 서원, 혹은 원사(院祠)로 함께 기록되어 혼선이 많다. 실제로 선조, 광해군, 인조 초는 사우로 설립한 유적을 서원으로 사액(賜額)하거나 건립하는 사례가 많았다.

변천

서원이 남설(濫設)되던 17, 18세기에 들어서면 서원과 사우의 차이가 점차 모호해져 양자 간의 차등이 점차 없어져 갔다. 서원과 사우가 동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조정에서조차 구별을 두지 않고 편액(扁額)을 하사하고 있다. 이렇게 양자 간의 구별이 점차 없어진 이유는 17, 18세기에 서원의 기능이 인재 양성과 강학 기능에서 점차 제향 중심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8세기 후반 이후 서원·사우의 남설 과정에서 향사자(享祀者)의 수가 급증하면서 혈연과 지연 등으로 연계된 인물들을 제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 사우로 불러야 마땅할 것도 서원이라 칭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고, 후손·문중 주도의 사우 건립이 일반화되어 본래의 건립 의도인 보본(報本), 즉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그 은혜를 갚는다는 뜻과 숭현(崇賢)의 정신이 점차 퇴색하였다. 때로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고관(高官)을 제향하여 본가와 결탁하고, 백성의 재산을 모점(冒占)하며 양역(良役)의 폐를 일으키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는 족적인 기반들을 유서로 하는 문중별로 각 성씨의 본관 지역이나 터를 잡고 정착한 입향(入鄕) 지역에의 원사 건립에 기인한 것으로 지역적 연고와 성씨의 권위를 부각시키려는 목적이 컸다. 즉 제향인에 대한 기준이 점차 해이해진 틈을 타서 후손들에 의한 문중의 선조 즉, 시조(始祖)나 고조 이전의 먼 조상인 원조(遠祖)·일정 지역에 제일 먼저 들어와 정착한 조상인 입향조(入鄕祖)·이름을 널리 알려 하나의 파(派)의 기원이 된 조상인 파조(派祖)·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인 중시조(中始祖)·이름이 높이 드러난 조상인 현조(顯祖) 등 문중 인물의 제향이 급증하였다.

이러한 남설 경향을 제어하기 위하여 1741년(영조 17) 영조는 팔도의 서원과 사묘(祠廟) 가운데 1714년(숙종 40) 금령 이후 사사로이 건립한 것들을 훼철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서원·사묘 건립에 관련된 수령과 건립을 앞장서서 추진한 유생을 처벌하였다(『영조실록』 17년 4월 8일).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도 계속되었던 듯 1781년(정조 5) 경상도관찰사조시준(趙時俊)은 문중 인물의 추향 문제를 지방의 무식한 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경중에 출몰하면서 예조에 연줄을 놓아 장제(狀題)와 관문(關文)을 얻고는 사우를 창건하고 추향을 일삼는데, 이는 어진 이를 사모하고 스승을 높이는 뜻에서 나온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혹은 자손으로서 선조를 들어 사사로움을 꾀하거나 미비한 자들이 여기에 기대어 행세하고자 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하였고(『정조실록』 5년 12월 28일), 다산 정약용도 사적인 사우 건립의 폐단이 날마다 새로이 나타나고 달마다 심해져 100리 되는 고을에 10여 개의 사우가 설치된 경우도 있고, 효행 등을 내세워 한 서원에 같은 가문의 부자·형제 12~13명의 위패가 놓여 있기도 한다고 지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목민심서(牧民心書)』
  • 이해준, 『조선 후기 문중 서원 연구』, 경인문화사, 2008.
  • 정만조, 『조선시대 서원 연구』, 집문당, 1997.
  • 유홍렬, 「조선 사묘(祠廟) 발생에 대한 일고찰」, 『진단학보』5, 1936.
  • 이해준, 「한국 서원과 향촌 사회」, 『한국학논총』29, 2006.
  • 정만조, 「조선조 서원의 정치·사회적 역할」, 『한국사학』10, 1989.
  • 정만조, 「한국 서원의 성립과 서원 문화 특성」, 『한국의 서원 유산』,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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