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군 이당(寧海君 李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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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5년(세종 17)~1477년(성종 8) = 43세]. 조선 전기 세종~성종 때 활동한 왕자. 세종(世宗)의 서출 10남 2녀 중에서 제 9왕자. 봉작(封爵)은 영해군(寧海君)이다. 초명(初名)은 이장(李璋)이었는데, 뒤에 이당(李瑭)으로 고쳤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김신빈(金愼嬪)은 청풍 김씨(淸風金氏)로서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김원(金元)의 딸이다. 김신빈이 낳은 아들 6명 중에서 다섯째인데, 동복형은 계양군(桂陽君)이증(李璔), 의창군(義昌君)이공(李玒), 밀성군(密城君)이침(李琛), 익현군(翼峴君)이관(李璭)이고, 동복아우는 담양군(潭陽君)이거(李璖)다.

세조 시대 활동

1435년(세종 17) 3월 20일 밤에 출생하였다. 1442년(세종 24) 1월 나이 8세 때 영해군에 봉해졌다. 1450년 나이 16세 때 세종이 승하하자, 어머니 김신빈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자, 종친(宗親)들과 왕자들은 수양대군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갈리었다. 영해군이당은 그의 동복형제들을 따라서 수양대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영해군이당은 계유정난 이후에 세조가 베푼 연회에 참석하였고, 1454년(단종 2) 7월 세조가 녹양평(綠楊坪)에서 군사를 훈련할 때에도 따라 갔다. 세조는 단종을 보호하거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처벌받은 이들의 가산을 적몰하고 이를 종친과 공신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영해군이당도 그 전토를 하사 받았다. 1456년(세조 2) 금성대군(錦城大君)의 강음(江陰)에 있는 전토와 박한(朴漢)의 신천(信川)에 있는 전토를 받았다. 또 세조가 베푸는 연회에 시연(侍宴)하였고, 관사(觀射)에도 입시(入侍)하였다.

1477년(성종 8) 5월 5일 졸하였는데, 향년이 43세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 8년 5월 5일 「영해군 이당 졸기」]

묘소와 후손

안도(安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1872년(고종 8) 영종정경(令宗正卿)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현재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도봉산에 있다.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신윤동(申允童)의 딸이고, 신효창(申孝昌)의 손녀이다.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영춘군(永春君)이인(李仁)이고 차남은 길안정(吉安正) 이의(李義)이다. 1녀는 박승약(朴承爚)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일성록(日省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백사집(白沙集)』
  • 『용재총화(慵齋叢話)』
  • 『한수제집(寒水齋集)』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