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난영(朴蘭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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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5년(선조 8)~1636년(인조 14) = 62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지사(知事)이다. 자는 형백(馨伯)이고,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큰형은 박계영(朴桂英)이고, 중형은 살수초관(殺手哨官)박규영(朴葵英)이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선조 때 사도시(司䆃寺)정(正), 면천군수(沔川郡守), 중군(中軍) 등을 지냈다.

광해군 초에 무이만호(撫夷萬戶)가 되었다가, 1618년(광해군 10) 7월 창성부사(昌城府使)가 되었다. 1619년(광해군 11) 오도원수(五道元帥)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김경서(金景瑞)를 따라 건주위(建州衛)의 후금(後金) 정벌을 위해 나갔다가 명(明)나라 대군(大軍)과 우리 삼영(三營)의 군대가 크게 패전하여 포로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군(後金軍)의 선도로 강홍립과 같이 입국하였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그는 회답관(回答官)·추신사(秋信使)·춘신사(春信使)·선위사(宣慰使)·선유사(宣諭使) 등으로 여러 차례 심양(瀋陽)을 내왕하며 후금을 회유하는데 힘썼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11월 중순에 박로(朴魯)와 함께 별사(別使)로 파견되었다가 볼모로 잡혀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휘하의 청군(淸軍) 진영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청(淸)나라의 요구로 능봉군(綾峯君)이이(李儞)와 심집(沈諿)을 왕제(王弟)와 대신(大臣)으로 가장시켜 적진으로 보냈다. 마부대(馬夫大)는 박난영에게 두 사람이 진짜 왕제와 대신인가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하였다. 그는 조정의 난감한 입장을 대변하기 위하여 사실이라고 증언하였으나, 곧 이들의 정체가 밝혀지자 청군에 의하여 살해되었으니, 1636년 12월 16일의 일이다.

시호와 추증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1675년(숙종 1)에 정문(旌門)하였다. 아들은 4형제로, 1자는 박입(朴雴)이고, 2자는 통선(通善)박임(朴霖)이며, 3자는 통덕랑(通德郞)박운(朴雲)이고, 서자 박문(朴雯)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