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尹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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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0년(세종 2)∼1467년(세조 13) = 48세.] 조선 초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부마. 봉작은 파원군(坡原君)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인수부 윤(仁壽府尹)윤창(尹敞)이고, 어머니 최씨(崔氏)는 성주사(成州事)최영(崔寧)의 딸이다. 태종의 부마이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그는 나이 16세인 1435년(세종 17)에 태종과 후궁(後宮) 이씨(李氏)에서 태어난 서출 제 13 왕녀인 숙순옹주(淑順翁主)에게 장가들면서 가선대부(嘉善大夫)파원군(坡原君)으로 봉해졌다. 그는 숙순옹주를 친히 맞아 갔는데, 친영(親迎)의 관습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세종실록』세종 17년 2월 29일 · 3월 4일 ] 1439년(세종 21)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3년간 시묘(侍墓)를 하였다.[『보한재집』 권17 「봉헌대부 의빈부승빈 윤공 묘지」] 1441년(세종 23)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였고, 1444년(세종 26) 통헌 대부(通憲大夫)로 승진하였다.[『보한재집』 권17 「봉헌대부 의빈부승빈 윤공 묘지」, 『세종실록』세종 26년 7월 1일] 1449년(문종 즉위) 봉헌 대부(奉憲大夫)로 승진하였다. 1466년(세조 12) 관제(官制)를 개정하면서 의빈부(儀賓府) 승빈(承賓)에 임명되었다. 1467년(세조 13) 10월 6일 병환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세조실록』세조 13년 10월 6일 「윤평 졸기」]

성품과 일화

윤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자품이 단아하고 영묘하였다. 성품이 담담하고 한가로운 것을 좋아하여 외부의 사람들과 접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부마(駙馬)는 대부분 술과 음악을 좋아하여 스스로 호방한 체하며 뽐내었다. 그러나 그는 재산도 풍부하였으나 한결같이 검소하였다고 한다.[『보한재집』 권17 「봉헌대부 의빈부승빈 윤공 묘지」] 『세조실록』의 「윤평 졸기」에는 “그가 집이 비록 부자였으나, 자못 검소하고 인색하였다.”고 하였다.[『세조실록』세조 13년 10월 6일 「윤평 졸기」]

묘소와 후손

시호는 강이(康夷)이다. 신숙주(申叔舟)가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보한재집(保閑齋集)』 권17 「봉헌대부 의빈부승빈 윤공 묘지(奉憲大夫儀賓府承賓尹公墓誌)」] 부인은 태종의 딸인 숙순 옹주인데, 2남 1녀를 낳았다. 1남은 윤분(尹枌)이고, 2남은 윤강(尹杠)이다. 1녀는 군기감(軍器監)첨정(僉正)심안인(沈安仁)에게 시집갔다.[『보한재집』 권17 「봉헌대부 의빈부승빈 윤공 묘지」]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선원계보(璿源系譜)』
  • 『보한재집(保閑齋集)』
  • 『호음잡고(湖陰雜稿)』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