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정각(誠正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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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의 영역으로 세자가 서연(書筵)하던 곳이자 왕이 한가로이 신하를 만나던 곳.

개설

건립 연대가 명확하지 않으나 1697년(숙종 23) 『숙종실록』 기사에 왕세자가 서연, 강학(講學)하던 장소임을 말해 주는 최초의 기록이 보인다. 숙종은 희정당(熙政堂)에서 신료들과 만나면서 왕세자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왕세자가 추위에도 불구하고 성정각에 나와 앉아 정성으로 학문을 닦기 때문이었다. 또한 승지(承旨)가 왕께 존호를 올리자는 비답(批答)을 들고 왔을 때, 세자는 성정각에서 뜰로 내려와 비답과 주찬을 받았다. 이 기록에서 성정각이 왕세자의 거처였음을 알 수 있다(『숙종실록』31년 2월 12일).

영조 역시 왕세제 시절에 성정각에 머물며 여러 인물과 대면하였다. 그러나 정조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성정각은 동궁의 처소보다는 왕이 사사로이 신하를 만나는 장소로 쓰였다. 또한 희정당처럼 야간에도 신하들을 만나 강학하고 경연하는[夜對] 편안한 장소로 쓰였다(『순조실록』 15년 9월 20일).

위치 및 용도

창덕궁 관물헌과 앞뒤로 배치되어 있는데 성정각이 서남쪽으로 약간 치우쳐 놓였다. 「동궐도(東闕圖)」상에서 살펴보면, 내반원(內班院)의 서쪽, 중희당(重熙堂)의 동쪽 사이에 들어 있던 건물이다. 세자의 서연 장소이며 동궁의 영역이었지만, 왕이 한가로이 신료들과 만나는 장소로도 애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성정각은 숙종과 경종시기에는 동궁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정조 때가 되면서 왕이 재위한 전 시기 동안 가장 오래고 빈번하게 사용한, 군신 간 소대(召對)의 장소였다. 건립 연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숙종시기에 성정각은 세자의 거처였다. 정조 즉위와 함께 창덕궁을 전반적으로 수리하면서 성정각도 함께 보수하여 왕의 정무 공간으로도 자주 쓰였다. 그러나 1782년(정조 6) 중희당이 새로 건립되면서 동궁의 영역이 보강되었고 세자에 관련된 의례 및 일상은 중희당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종 역시 창덕궁에 머무는 동안은 대체로 성정각을 소대와 진강(進講)하는 정무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지금은 성정각이 내의원 건물로 되어 있지만 순종 즉위 후,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때까지는 성정각이 내의원 건물로 쓰이지 않았다. 1907년(융희 1) 12월 1일에 발행된 잡지 『서우(西友)』 13호에 성정각을 ‘황태자 전하의 주(住)하시던 처(處)요’ 하고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창덕궁을 비롯한 모든 궁궐의 변화와 함께 인정전(仁政殿) 서측에 있던 내의원(內醫院) 장소를 성정각으로 옮기고, 정면 부속 건물에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이라는 현판을 달고 건물의 용도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형태

「동궐도」상에서 성정각 건물의 전체적인 형태는 ‘ㄱ’자형이다. 넓은 월대를 갖춘 기단 위에 놓여 있어 앞으로 꺾여 나온 동측부는 2층 누각의 형태를 취하였고 아래층은 문짝과 창호가 달린 실(室)로 구성되었다. 지금은 월대 없는 세벌대 기단 위에 놓여, 난간 두른 누각을 갖춘 ‘ㄱ’자형 건물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 누각 부분은 「동궐도」에서와는 달리 반 칸만 앞으로 빠져나와 있고 아래층은 비어 있는 누마루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이 누각의 정면에는 보춘정(報春亭), 측면에는 희우루(喜雨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익공 오량 구조에 이중처마를 내고 팔작지붕을 얹은 집이다. 누각 우측으로 방과 대청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고 그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으며 그 우측에 다시 방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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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궁궐지(宮闕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 서우학회, 『서우(西友)』제13호,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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