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합(思政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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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북쪽에 위치한 양화당의 온돌방.

개설

사정합은 양화당(養和堂)의 서쪽에 위치한 온돌방으로 추정된다. 1483년(성종 14)에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예종비 안순왕후(安順王后), 덕종비 소혜왕후(昭惠王后)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 터에 창경궁을 조성할 때, 양화당도 건립되었다(『성종실록』 15년 2월 11일).

사정합에 대한 기록은 1609년(광해군 1)에 자전(慈殿)이 동궁의 처소인 저승전(儲承殿)에 머물고 있어 미안하다며 양화당의 사정합으로 거처를 정할 것을 논의하는 데에서 한 번 등장한다(『광해군일기』 1년 3월 19일). 그 외 다른 기록이 없어 그 용도와 성격을 밝히기 어렵다. 그러나 건물에 이름을 붙일 때에는 그 용도와 관련되며, 특히 건물 한 칸의 방에 이름이 지어질 때에는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의 성향과 용도에 따라 특별히 이름을 지어 현판은 내걸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사정합’이라는 이름에서 사정(思政)은 정도전(鄭道傳)이 경복궁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릴 때 편전으로 사용할 건물에 붙인 명칭과 같다. 정도전은 『서경(書經)』의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하는 구절을 인용하며, 왕이 매일같이 편전에 들어 정사를 보고 명을 내려 지휘함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러한 이름을 올렸다고 하였다. 사정합이라는 방의 이름도 왕이 양화당에 들어 신하를 만나고 정사를 논하는 일이 자주 있어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위치 및 용도

양화당의 위치는 통명전(通明殿)의 동쪽, 환경전(歡慶殿)과 경춘전(景春殿)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창경궁의 후원에 인접해 있다. 후원에 가까워 왕이 유생을 불러 글을 짓게 하거나, 경전을 익히는 장소로 사용하기 좋아 영조 이전에는 주로 왕이 사용하였다.

명종은 양화당에서 유생을 불러 글을 짓게 하고 시험을 보았다. 인조는 1633년(인조 11)부터 1647년(인조 25)까지 이곳에 거처하면서 신하를 만나고,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숙종도 창경궁에 임어하는 동안 이곳에서 주강(晝講)을 행하거나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했다.

이후 1726년(영조 2)에 영조가 경종의 삼년상을 마치고 통명전에서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렸다(『영조실록』 2년 9월 10일). 양화당에서는 왕비의 책봉례를 행하였는데, 이후 세자빈의 처소로 사용하였다. 1878년(고종 15)에는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양화당에서 승하하였는데, 이것으로 보아 양화당은 대비전에서 주로 사용한 듯하다(『고종실록』 15년 5월 12일). 통명전과 연계하여 창경궁의 북쪽 영역이 대비전으로 주로 사용되고 자경전(慈慶殿)이 조성되는 등의 변화가 생기면서, 주로 대비전에서 양화당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및 현황

양화당의 사정합은 1483년(성종 14)에 건립되어 왕이 주로 신료들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하면서 ‘사정합’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중에도 소실되지 않아 인조 연간에 주로 왕이 임어하여 사용하였으며, 숙종대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1730년(영조 6)에는 세자빈의 거처로 사용하였는데, 창경궁 침전 온돌 아래에서 흉물이 나타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양화당도 철거하여 새로 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화당은 대비, 세자빈 등이 사용하는 내명부의 공간으로 변화되고, 사정합이라는 방의 명칭도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