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회루(慶會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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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접대와 왕실의 연회를 위하여 경복궁의 침전 영역 서쪽 연못에 세운 누각.

개설

태종대 박자청(朴子靑)이 경복궁에 지은 누각으로 주위에 넓은 연못을 파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건물을 지었다. 중국 사신 접대와 왕실 잔치, 군신 간의 회합 등 공식적인 연회 장소로 사용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고종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의 침전 서쪽, 수정전(壽靜殿) 북쪽에 있다. 태종대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지었다(『태종실록』 12년 5월 16일). 신하와 종친에게 연회를 베풀 때에도 사용하였으며, 이곳에서 활쏘기나 과거시험 등을 행하기도 했다.

변천 및 현황

태종대인 1412년(태종 12)에 기존의 누각을 고쳐 짓고 그 이름을 처음으로 경회루라고 지었다. 현판은 당시 세자이던 양녕대군(讓寧大君)에게 쓰도록 했다. 하륜(河崙)이 지은 경회루 기문에 의하면, 후전(後殿)의 서루(西樓)가 기울어 이를 고쳐 세우려다가 땅이 습한 것을 보고 박자청이 지형을 살펴 위치를 약간 옮기고 누각의 둘레에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며, ‘경회(慶會)’라는 이름은 인군과 신하가 덕으로서 만난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1475년(성종 6) 경회루가 기울어 위태로워지자 다시 수리하였는데 이때 돌기둥에 용을 새기고 구리로 취두를 만드는 등 이전보다 화려하게 만들었다(『성종실록』6년 5월 12일).

경회루는 임진왜란 때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함께 소실되었다. 조선후기의 경복궁에는 근정전(勤政殿)의 월대, 경회루의 연못과 돌기둥, 광화문(光化門)의 육축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조선후기 지도에는 경복궁이 경회루의 연못과 돌기둥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조선후기에는 이처럼 돌기둥만 남아 있는 경회루 연못가에서 종종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조선전기의 주요 전각이 거의 빠짐없이 복원되었다. 1867년(고종 4) 4월 22일에는 경회루의 상량식을 계획했고, 상량문 서사관에 정기세(鄭基世)를, 현판 서사관에 신관호(申觀浩)를 임명했다(『고종실록』 4년 3월 27일). 1985년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고종대에 경복궁의 중건 지시가 내린 직후, 정학순(丁學洵)은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정학순이 경회루의 옛터를 보고 『주역(周易)』과 명당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그 설계 원리를 해석한 것으로, 설계 원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경회루36궁지도(慶會樓36宮之圖)」가 수록되어 있다. 정학순은 경회루의 평면, 입면, 주변 환경이 모두 주역의 원리에 입각하여 구성되었다고 풀이하였다. 그에 따르면 중앙의 3칸은 천지인의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그 공간을 만드는 8개의 기둥은 팔괘를 상징한다. 그 바깥쪽의 12칸은 헌(軒)이며 1년 12개월을 상징한다. 제일 바깥쪽의 20칸은 낭무(廊廡)이다. 24개의 기둥은 24방(方)의 절후(節侯)를 이룬다.

1867년(고종 4)에 중건한 경회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누각이며 공포는 이익공이다. 경복궁에서 근정전 다음으로 큰 건물로서 하층은 석주를 세웠으며 동남쪽과 서남쪽에 각각 계단을 설치하였다. 2층은 기둥 열에 따라 창호를 설치하여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3단계의 바닥 차이와 공간의 위계가 분명하도록 하고 있다. 하층의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마감하였다. 바닥의 면적이 넓으므로 측면의 폭이 깊어 지붕을 구성하는 상부 가구는 11량 가구에 달한다.

경회루가 있는 연못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며 경회루는 동쪽에 치우쳐 있다. 연못의 사방에 담장을 둘렀으며 동쪽에 3개의 문을 두었는데, 이견문(利見門), 함홍문(含弘門), 자시문(資始門)이다. 각각의 문 안쪽에는 다리가 있어서 경회루가 있는 연못의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제일 남쪽의 다리에는 왕이 다니는 어로(御路)가 있어서 다른 두 다리보다 폭이 넓다. 북쪽 담장에는 필관문(必觀門), 남쪽에는 민유문(民猶門), 서쪽에는 천일문(天一門)이라는 일각문이 있었으나 남쪽과 서쪽의 담장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경회루는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를 한 장소이다. 단종은 1455년(세조 1)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首陽大君)을 경회루 아래로 불러 대보(大寶), 즉 옥새를 넘기며 양위하였다. 세조는 울면서 사양하였으나, 곧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세조실록』 1년 윤6월 11일).

폭정을 일삼다가 폐위된 연산군은 경회루 주변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이곳에 흥청과 운평이라는 기생을 불러 놀았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여기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참고문헌

  • 『호정집(浩亭集)』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