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성(金順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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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62년(철종 13) = ?]. 조선 후기 헌종(憲宗)~철종(哲宗) 때의 관료. 오위장(五衛將) 당상(堂上)을 지냈다. 일명 김여상. 한때 천주교 신자로,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다른 신자들을 밀고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하전(李夏銓)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헌종~철종 시대 활동

천주교 신자로서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던 김순성(金順性)은 1839년(헌종 5) 3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일 것을 천명하는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을 내리자 신자들을 밀고하여 공을 세우고 큰 벼슬을 얻고자 하였다. 당시 교우들 사이에서 신임을 얻고 있었던 김순성은 이때 천주교의 지도자들이었던 정하상(丁夏祥)·유진길(劉進吉)·현석문(玄錫文) 등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더 큰 공을 세우고자 조선에 비밀리에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전개하던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보필하던 복사 정화경을 속여 거처지도 알아내 밀고하였다.[『기해일기(己亥日記)』]

이 같은 활동으로 김순성은 오위장 당상에 올랐으나, 이는 명예직일 뿐 아무런 권력이 없던 자리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헌종 5년 10월 25일] 게다가 1840년(헌종 6)에는 난설(亂說)을 퍼트렸다는 죄목으로 절도(絶島)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헌종실록(憲宗實錄)』 6년 5월 12일),[『승정원일기』헌종 6년 5월 12일]

1853년(철종 4) 특사로 유배에서 풀려난 김순성은 1862년(철종 13) 이긍선(李兢善)과 더불어 중종(中宗)의 후손인 완창군(完昌君)이시인(李時仁)의 아들 이하전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모반을 꾀하였다는 이재두(李載斗)의 고발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철종실록(哲宗實錄)』 13년 7월 25일) 이후 대역부도(大逆不道)를 범했다는 죄목으로 7월 26일 참수형에 처해졌다.(『철종실록』 13년 7월 26일) 하지만 이후 이 사건은 이재두의 무고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성품과 일화

김순성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당시 천주교회의 핵심 인물들을 고발하여 큰 공을 세우고 싶었다. 이를 위해 그는 집회가 있으면 가장 먼저 나오고 사람들 앞에서 교리문답과 성서를 읽어주며 모범을 보이기도 하여 신자들의 환심을 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하여 밀고를 시작하였다. 또한 자신의 밀고에 의해 체포된 처녀 교우들을 농락하려고 하였다.

이 같은 그의 행동에 천주교인은 물론이고 천주교인이 아닌 일반 백성들도 그를 몹시 싫어하고 사람답지 않은 사람으로 여겼다고 한다.[『기해일기』]

참고문헌

  • 『헌종실록(憲宗實錄)』
  • 『철종실록(哲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기해일기(己亥日記)』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