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량(閔晉亮)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1월 9일 (화) 22:41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601년(선조34)∼1671년(현종12) = 71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호는 구졸(九拙)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조 판서민성휘(閔聖徽)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완양군(完陽君)이의정(李義貞)의 딸이다. 호조 정랑 민유부(閔有孚)의 손자이고, 성균관 전적(典籍)민사량(閔思亮)의 형이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35년(인조13)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5세였다. 음보(蔭補)로 1636년(인조14) 목릉(穆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가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으로 나갔다. 관례에 따라 직장(直長)으로 옮겼고, 의금부 도사(都事)를 거쳐 1646년(인조24) 석성현감(石城縣監)이 되었다. 그때 충청도 지방에 도둑이 많았는데, 그가 토벌하여 도둑을 없애자, 그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아버지 민성휘가 사신으로 북경(北京)에 갔다가 죽었는데, 북경으로 달려가서 반장(返葬)하고 3년 동안 상례(喪禮)를 치렀다. 그 뒤에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청나라 사신의 역관정명수(鄭命壽)가 와서 일찍이 그의 아버지 민성휘에게 당한 수모를 복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남양부사(南陽府使)를 거쳐 파주군수(坡州郡守)가 되었는데, 그때 율곡(栗谷)이이(李珥)의 사당을 보수하였다.

현종 초에 양주군수(楊州郡守)에 임명되었다가 태안군수(泰安郡守)로 나갔는데, 흉년에 황정(荒政)을 베풀어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1661년(현종2) 3도(道) 암행어사가 그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여 현종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포상(褒賞)으로 반숙마를 하사 받고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가자(加資)되었다. 내직으로 들어와서 중추부 첨지사와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재령군수(載寧郡守)를 거쳐 한산군수(韓山郡守)로 나갔는데, 청렴한 수령으로 널리 알려졌다. 1665년(현종6)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있을 때, 그곳에서 주인을 살해한 계집종 생이(生伊)가 자기 죄를 승복하고 능지처참(陵遲處斬)된 사건이 있었다. 종이 주인을 죽이면 십악(十惡)의 범죄에 해당하여 수령관은 파직되고 읍호(邑號)를 강등하므로, 민진량도 법전에 따라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양주는 능침(陵寢)이 있는 고을이라고 하여 읍호는 강등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대단히 부끄럽게 여겨서 선영이 있는 곳에 움막을 짓고 벽에다 ‘난가재(爛柯齋)’라는 편액을 걸어 놓았으며 자호를 구졸(九拙)이라 하였다. 이후 자책하면서 시서(詩書)를 탐구하고 만년을 보냈다.

한편, 계모를 정성으로 섬기고 배설물을 맛보아 그 병을 증험하기까지 하였는데, 그가 69세 때 계모가 돌아가자, 슬픔을 다하여 상례(喪禮)를 치렀다. 그러다가 건강을 해쳐서 1671년(현종12) 12월 초4일에 죽으니, 향년이 70세였다.

성품과 일화

민진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깨끗하여 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벼슬살이를 청렴하고 엄격하게 하였으므로, 체직되어 돌아올 때에는 행낭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곤궁한 사람을 돌보면서 아낌없이 구제하였는데, 혹시 노비나 토지와 같은 재산 문제를 가지고 다투어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재산 때문에 남과 다투는 것은 나의 수치다.” 하고 따지지 않고 모두 주었다. 그의 녹봉은 모두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에 썼다. 경서(經書)와 사책(史冊)을 즐겨 읽었지만, 시를 짓는 것을 가장 좋아하였다. 김집을 비롯하여, 윤원거(尹元擧) · 윤문거(尹文擧) · 윤선거(尹宣擧) 등과 곧잘 어울려 학문을 토론하고 우의(友誼)를 다짐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황해도 평산(平山) 수월산(水月山) 서쪽 산기슭에 있는데, 둘째 부인과 합장되었다.친구 김집의 제자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첫째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판서(判書)이명(李溟)의 딸인데 후사가 없고, 둘째 부인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유대칭(兪大偁)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자 민주면(閔周冕)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도기행(燕途紀行)』
  • 『잠곡유고(潛谷遺稿)』
  • 『용주유고(龍洲遺稿)』
  • 『백주집(白洲集)』
  • 『퇴우당집(退憂堂集)』
  • 『염헌집(恬軒集)』
  • 『지수재집(知守齋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