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화당(瑤華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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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이 창경궁에 공주의 거처로 조성한 별당(別堂).

개설

요화당은 창경궁의 별당으로 1656년(효종 7) 당시 공주들의 거처로 조성하였다. 이때 요화당, 취요헌(翠耀軒), 난향각(蘭香閣), 계월합(桂月閤)을 지어 숙안공주(淑安公主), 숙명공주(淑明公主), 숙휘공주(淑徽公主),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네 공주와 그들의 남편인 익평위(益平尉), 청평위(靑平尉), 인평위(寅平尉), 동평위(東平尉) 등에게 주었다.

효종은 인선왕후(仁宣王后) 사이에서 세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낳았는데, 아들 둘은 일찍 죽고 왕세자 이연(李棩)은 나중에 현종이 된다. 다섯 딸 중 맏이는 숙안공주이며 1650년(효종 1)에 익평위 홍득기(洪得箕)와 혼례를 올린다. 둘째 딸 숙명공주는 1652년(효종 3) 5월에 청평위 심익현(沈益顯)에게 시집을 갔다(『효종실록』 3년 5월 3일). 셋째 딸 숙휘공주는 1653년(효종 4)에 인평위 정제현(鄭齊賢)과 혼인하였다(『효종실록』 4년 10월 2일). 넷째는 숙정공주이며 1656년(효종 7)에 영의정(領議政)정태화(鄭太和)의 아들인 동평위 정재륜(鄭載崙)과 혼례를 올렸다(『효종실록』 7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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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공주들을 위해 궁궐 밖에 집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별당은 공주와 그 남편이 항상 머무는 공간이라기보다 이들이 궁궐에 들렀을 때 머물 수 있는 별당으로 지어준 것이다. 그런데 효종은 본래 검소하였다고 하나 공주와 도위(都尉)에게는 대규모 집을 지어 주고 토지를 내어 주어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653년에 숙명공주를 위해 인경궁(仁慶宮) 옛터에 집을 지었는데, 그 제도가 굉장하고 많은 공력과 물력이 들었다(『효종실록』 4년 8월 19일). 이때의 청평위궁은 현재 그 모습을 담고 있는 도면이 남아 있다.

위치 및 용도

창경궁 대내의 별당으로 창경궁 북쪽 후원에 가깝다. 요화당의 서북쪽에는 건극당(建極堂)이 있으며, 동남쪽에는 통화재(通和齋)가 있다. 현종대에 왕이 건극당에 머물렀는데, 그 가까이에 요화당을 비롯하여 정일재(精一齋), 계월합, 난향각을 지어 효종의 네 딸과 네 사위가 독서의 장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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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화당은 1684년(숙종 10)부터 1685년(숙종 11) 사이에는 왕이 이어하여 신하들을 만나는 곳으로 자주 사용하였다(『숙종실록』 10년 12월 26일). 1786년(정조 10)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자, 요화당을 빈궁(殯宮)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0년 5월 13일). 1815년(순조 15)에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빈궁이 통화전(通和殿), 즉 통화재에 설치되었고, 1821년(순조 21)에는 효의왕후(孝懿王后)의 빈전, 1830년(순조 30)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빈궁이 통화전에 설치되었다. 이때 요화당은 통화재의 서북쪽에 있어 빈전 의례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요화당은 조성된 이후 1730년(영조 6)에 창경궁의 내전을 전체적으로 수리하면서 함께 수리되었다. 이때 경극당(敬極堂), 보경당(寶慶堂), 연희당(延禧堂), 인경당, 집복헌(集福軒), 난향각, 계월합(桂月閤), 취휘헌(翠輝軒) 등과 함께 방의 벽을 수리하였다. 순조 연간까지 이용하였으며 「동궐도(東闕圖)」에 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헌종 연간에 『궁궐지(宮闕志)』를 정리할 즈음에는 이미 소실되었다고 한다.

형태

「동궐도」에 묘사된 요화당은 정면 4칸 규모이며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동쪽으로 연이어 남북 축으로 8칸 규모의 행각이 붙어 있는데 이곳에 계월합이 있다. 이 행각은 요화당 북쪽에 있는 난향각과 요화당을 이어준다. 요화당과 난향각·계월합은 ‘ㄷ’자형으로 하나의 마당을 공유하는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03(숙종 29) 연잉군(延礽君), 즉 영조의 관례를 요화당에서 행하고자 하였으나 세자가 아닌 왕자로서 궐내에서 관례를 올리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는 신료들의 지적에 따라 통화문(通化門)의 동쪽 월랑에서 치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