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청(郎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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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각 관청에 소속되어 실무를 담당한 중견 관원 또는 관직.

개설

조선시대에는 원래 각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한 당하관을 낭관(郎官)이라고 불렀는데, 낭청(郎廳)은 낭관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낭청은 관청에 따라 정규직으로 직제화되기도 하고, 일부의 경우 임시직인 가낭청(假郎聽)으로 충원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455년(세조 1)의 기사에서는, 『한서(漢書)』를 인용하며 “낭관은 위로 열수(列宿)에 응하고 나가서는 100리를 다스리니, 진실로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백성들이 앙화(殃禍)를 받는다.”라고 하였다(『세조실록』 1년 11월 8일). 여기서 ‘열수’는 황제의 별자리인 오성(五星) 뒤에 있는 15성(星)을 가리키는데, 조정에서 천자의 뒤에 늘어선 낭관을 뜻한다. 결국 이 기사는 낭관 즉 낭청의 역할과 기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담당 직무

낭청은 각 관청에 소속되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6조의 낭관인 정랑(正郞)좌랑(佐郞)은 육조의 속사(屬司)를 맡아 관장하였으며, 의생을 가르칠 목적으로 삼의사(三醫司)의 겸관을 육조의 낭관에게 맡겼다. 심지어 가낭청도 일반 낭청과 마찬가지로 정사를 담당하였다는 기록(『성종실록』 1년 12월 19일)을 감안하면, 중앙 관서의 실무적인 모든 일은 낭청이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낭청 가운데 특정한 일을 담당한 관원은 색낭청(色郎廳)이라고 불렀으며(『성종실록』 14년 5월 7일), 죄인을 심문할 때 문서의 기록과 낭독을 담당한 임시직 낭청은 문사낭청(問事郎廳)이라고 하였다(『성종실록』 25년 7월 15일). 또한 다른 관직의 일을 수행하면서 실무를 겸직한 낭청은 겸낭청이라고 일컬었다(『성종실록』 4년 9월 17일). 한편 개인이 거느린 낭청도 있었는데, 이들은 고관이 해야 할 일 중 실무적인 일을 대신하였다(『성종실록』 3년 12월 7일).

낭청이 수행한 일은 매우 다양하였다. 1455년(세조 1)에는 유배를 떠난 인사가 불법을 저지르자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의금부의 낭청을 파견하였다(『세조실록』 1년 11월 4일). 『동국통감(東國通鑑)』과 같은 역사서를 편찬할 때 실무를 맡기기 위해 낭청을 두기도 하였고(『성종실록』 16년 7월 26일), 공신도감의 실무관으로 편성하거나(『명종실록』 즉위년 9월 22일), 중요한 문헌을 찬집할 때 찬집청(撰集廳)에 편성하기도 하였다(『명종실록』 3년 2월 12일). 그뿐 아니라 낭청은 당상관이 범죄를 저지른 경우 나포하는 일도 맡았다(『성종실록』 25년 2월 14일). 1592년(선조 25)에는 비변사의 요청으로 서울 수복을 위해 군정의 상황을 파악할 목적으로 낭청을 파견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5년 11월 3일). 실록청에 편성된 낭청 역시 『조선왕조실록』 편찬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그런데 낭청이 어느 정도의 기한으로 임무를 수행했는지 그 재임 기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다만 육조 낭관의 경우 30개월을 채워야 다른 관서로 옮길 수 있다는 기사(『세종실록』 18년 8월 3일), (『문종실록』 2년 3월 3일)로 미루어, 낭청도 일정한 재임 기한을 유지해야 옮길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조선시대 전기부터 설치되어 운영된 낭청은 의정부와 육조, 비변사 등 정규 관청은 물론이고,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한 공신도감 및 실록청 등에도 소속되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낭청의 임무가 중요하므로 적당한 인사를 가려서 임명해야 한다는 기록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1417년(태종 17)에는 육조·한성부 낭청의 포폄은 각각 당상관이 하고, 형조·도관 낭청의 포폄은 겸지조사(兼知曹事)가 하도록 하여(『태종실록』 17년 11월 22일), 낭청을 포폄하는 법을 규정하기도 하였다.

15세기 말~16세기 이후 낭관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이들만의 계회(契會)가 빈번해지고, 이를 묘사한 계회도가 현재 전하고 있다. 낭관 가운데 이조와 병조의 낭관은 전랑(銓郞)이라 하는데, 이들은 자기 후임을 스스로 선발하는 자천제와 함께 삼사(三司) 관원들의 선발권인 통청권(通淸權)을 갖고 조정의 언론을 장악하였다. 따라서 전랑직을 누가 차지하는가는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되어 결국 동인과 서인 분당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7세기 사림 정치 시기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전랑, 특히 이조 전랑에 대해 17세기 후반 이후 견제가 이루어져 자천제 및 통청권이 혁파되기도 하였다. 한편 비변사가 설치되면서 정식 직제로 낭청직이 마련되었고, 새롭게 신설된 선혜청이나 준천사를 비롯해 각 군영에도 낭청직이 설치되어 실무를 주관하였다.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연구』, 국학자료원, 1998.
  • 신석호,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 『한국사료해설집』, 한국사학회, 1964.
  • 이재호, 「조선비변사고」, 『역사학보』 50,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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