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모당(奉謨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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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왕의 어제(御製)·어필(御筆) 등을 봉안하던 사고(史庫).

개설

왕이 남긴 어제(御製) 글씨와 기록은 왕의 뜻과 덕으로 여겨 소중히 다루었다. 중국에서는 왕마다 어제가 있으면 하나의 각(閣)을 세워 보관하였다. 이 제도에 따라 세조 때 규장각을 설치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광해군과 숙종 때에는 각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규장각이라는 명칭을 편액하여 어제를 관리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후 정조가 즉위하던 1776년에 비로소 창덕궁의 금원(禁苑) 북쪽에 어제를 관리하는 건물을 건립하고 규모를 갖춘 관리처를 만들었다.

이곳을 처음에는 어제각(御製閣)이라 부르다가 숙종 때의 명칭을 따라 규장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 규장각 주합루(宙合樓)와 함께 또 하나의 사고를 만드는데 그 건물이 봉모당이다. 규장각 건물에는 당대 국왕의 어진(御眞) 등을 봉안하였고, 봉모당에는 열성조의 것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1월과 7월에 길일을 가려 왕과 왕세자가 전배(展拜)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9월 25일).

봉모당은 창덕궁 금원에 있던 열무정(閱武亭)의 터에 세워졌다. 열무정은 궁궐 북편의 너른 터에 놓여 세조 때부터 잔치를 즐기고, 활쏘기를 구경하던 장소였다. 인조 때는 열무정의 주변에 못을 파고 배를 띄워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위치 및 용도

봉모당은 선대왕의 어제·어필·어화(御畫)·고명(顧命)·유고(遺誥)·밀교(密敎)·선보(璿譜)·세보(世譜)·보록(寶錄)·장지(狀誌)·인보(印譜) 등을 봉안하던 사고였다. 순조대에 규장각은 서원에, 봉모당은 금원에 세웠다고 그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봉모당은 주합루의 서남쪽에 있는 열고관에서 서남쪽으로 더 내려가고, 대비 처소인 수정전(修政殿)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대개 규장각과 봉모당의 용도는 궁궐 내의 사고로써 같았기 때문에 봉모당을 설명할 때 규장각을 들어 위치를 설명하는 예가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자주 보인다. 이 외에도 왕실의 사고는 망묘루(望廟樓), 화령전(華寧殿), 문헌각(文獻閣) 등이 더 있고, 사고에 보관한 문서들은 각 명산에 위치한 외규장각에도 보관하였다.

변천 및 현황

열무정 자리에 봉모당이 세워졌으나 규모와 건물의 형태를 매우 검박하게 하였다. 정조는 이 건물을 둘러보며 규모가 거칠고 엉성하여 존경스럽지 않다며 건물 주위로 곡장을 두르고 내부에 시렁, 즉 가자(架子)를 만들어 편리하게 봉안하도록 했다(『정조실록』 5년 6월 13일). 그날의 담장 토역 공사는 뒷날로 미뤄졌고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궐도(東闕圖)」상에는 전면에 운한문(雲漢門)을 둔 행각이 놓여 있고 행각 양쪽에서 시작되는 담장을 두르고 있다. 1785년(정조 9)에 다시 한 번 보수 공사가 있었다. 점점 증가하던 국왕의 어제 등을 정리하기 위해 내부의 수납장인 장가(裝架)를 바꾸는 것이었다. 1856년(철종 7)에는 봉모당의 처소가 매우 좁으니 이건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봉모당은 1857년 창덕궁 서쪽 이문원(摛文院)의 대유재(大猷齋)로 옮겨 갔다(『철종실록』 8년 2월 8일).

1911년에는 이문원의 대유재와 소유재(小猷齋) 자리에 새로운 규장각 건물이 들어서며 봉모당도 일본식 건물로 지어졌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다가 2005년 복원되었다. 지금의 봉모당은 이때 복원된 것이며 이문원 옛 소유재 자리에 규장각과 앞뒤로 나란히 놓여 있다. 그러므로 원래 정조대 건립된 봉모당은 대조전(大造殿) 동북쪽에 있었으나(그림 1), 지금은 인정전(仁政殿) 서쪽 궐내 각사 영역에 들어 있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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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궁궐지(宮闕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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