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전(石造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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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황궁인 경운궁(현: 덕수궁)의 정전(正殿).

개설

석조전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완벽한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궁궐의 전각이다. 석조전이 그리스 신전의 건축 양식에 기초한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서구의 근대 국가를 모델로 한 새로운 국가 체제인 대한제국의 정전으로 석조전을 건축했기 때문이다.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전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건축 양식이었다. 따라서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정전은 대한제국의 지향점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자 대한제국이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나라임을 과시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위치 및 용도

현 덕수궁 궁역 안쪽에 위치하며, 중화전 서북쪽에 있다. 대한제국의 정전으로 건축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고종과 순종, 영친왕 등의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과 외국사절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태황제인 고종이 서거한 다음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개최된 바 있다.

변천 및 현황

석조전은 1893년(고종 30) 이래 조선 정부와 대한제국 정부에서 총세무사(總稅務司)로 근무했던 영국인 브라운([柏貞安], Brown, John Mcleavy)의 발의로 건축이 시작되었다. 1897년(광무 1) 4월 6일자 『독립신문(獨立新聞)』에는, ‘영국 사람 브라운 씨와 통변관 최영하(崔榮夏) 씨가 3월 15일 경운궁에 들어가서 궁 안의 지형을 측량하고 나왔다더라.’ 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시점이 1897년 2월 20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환궁과 함께 대한제국 건설 계획과 제국의 얼굴이 될 정전 건축 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설계는 1897년 중국의 상하이에 거주하던 J.R 하딩(Harding, J. R.)에게 의뢰하였고, 늦어도 1900년(광무 4) 5월 이전에 설계가 완료되었다. 1900년 5월 26일자 『아메리칸 아키텍처 앤드 빌딩 뉴스(American Architecture and Building News)』에는 ‘대한제국 황제의 새로운 궁궐, 남동측 입면(The New Palace for H. M. The Emperor of Corea, South East Front View, J. Reginald Harding, Architect)’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 실려 있다.

흥미로운 것은 사진이 모형 사진이라는 점이다. 건축물을 지을 때 모형을 사용하는 전통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서양의 역사주의 건축 양식의 전각을 지으면서 모형을 제작했고, 이 모형 사진을 미국의 건축 잡지에 게재한 것이다. 당시 낯선 서양 건축물을 지으면서 왕에게 신축 건물을 소개하기 위해 모형을 제작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마치 르네상스시기에 건축가가 교회를 설계한 후 교황에게 설계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모형을 제작했던 것과 같다. 모형 사진 뒤로 우리의 전통 건축 지붕이 보이는데 이는 모형 사진을 촬영한 곳이 서울이었음을 의미한다. 모형 사진은 중앙 현관의 계단 양쪽 끝의 처리가 현재의 모습과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현재의 모습과 일치한다.

석조전 공사는 1904년(광무 8)의 경운궁 화재와 중화전(中和殿) 중건 공사 등으로 인해 몇 차례 중단되었다가 재개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석조전을 발의했던 브라운총세무사가 일본인으로 교체되었고, 1905년(광무 9)부터 영국인 데이비슨(Davison, M. H.)에 의해 석조전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실내 공사는 영국인 건축 기사 로벨(Lovell)이 담당하였으며, 내부 배관 및 난방 설비는 런던의 크리톨 회사(Critall & Co.)가 맡고, 내부 장치와 비품은 메이플 회사(Messers Maple & Co.)에서 맡았다.

석조전은 완공 후에는 태황제인 고종이 귀빈들을 접대하고 만찬을 행하는 용도로 사용하였으나, 고종이 서거한 후에는 이왕가의 미술관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해방 직후에는 해방 기념 문화대축전 미술전람회가 1945년 10월 20일부터 30일까지 석조전에서 개최되었다. 1946년 3월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며, 한국전쟁 후에는 현대미술관과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형태

석조전은 ‘돌로 지은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궁궐 건축의 이름 짓기와는 전혀 다른 작명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지어 왔다. 돌로 집을 짓는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돌로 집을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건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집의 재료가 곧바로 집의 이름이 된 것이다. 동시에 돌로 집을 짓는 전통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돌집을 짓는다는 것은 곧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석조전은 그리스 신전 건축에 기초한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외견상 3층 건축으로 보이지만, 중앙의 주 계단을 올라서면 주된 층이므로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어진 건축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땅에 면한 지하층이 기단부를 형성하고 있다. 2층 전면에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이 열을 지어 있으며, 그 위로 삼각형의 박공인 페디먼트(pediment)가 설치되어 있다. 건물에서 넓은 면이 정면을 형성하고 있어 페디먼트를 전면 전체에 설치할 수 없기 때문에 중앙부를 돌출시켜 강조하였으며 돌출된 부분에만 페디먼트를 설치하였다. 기둥을 사용하는 데 있어 정면의 현관에는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지만, 좌우 회랑 부분에는 사각기둥을 사용하여 변화를 주었다.

석조전에는 전면뿐 아니라 양측 면에도 베란다가 설치되어 있어, 베란다 건축 양식 또는 식민지 건축 양식으로 부른다. 건물의 전면에 베란다가 설치되는 것은 유럽에서는 볼 수 없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에서는 일반적이다. 이는 인도와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일찍이 식민지를 경영했던 영국과 프랑스가 고온 다습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전통 건축 양식을 변형시킨 결과이다. 베란다는 그늘을 만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외부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온 다습하지는 않지만 하딩은 상하이에서 활동하여 한국의 기후와 풍토에 대한 이해가 적었다. 때문에 석조전을 설계할 때 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건축 양식을 채택하여 베란다를 전면에 설치하였다.

석조전은 1910년 완공되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에서 황궁으로 사용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종이 덕수궁에 거처하면서 석조전을 사용한 용도를 보면 침전과 편전의 기능이 복합된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통적인 궁궐 건축에서 편전과 침전이 분리되었던 것과 비교된다. 서양 건축이 전통 건축과 달리 다층 건물이고 넓은 내부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인데, 서양 건축의 도입으로 전통 궁궐 건축의 기능과 공간의 분리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석조전은 1층에 접견실 및 홀, 2층에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거실이 있고, 지층에는 시종들의 방과 지원 시설이 위치한다. 중앙의 계단을 올라 현관으로 들어서면, 여느 건물과 달리 1층과 2층이 하나로 된 중앙 홀을 만나게 된다. 주 현관홀은 천창(天窓)에서 채광된 햇빛으로 밝게 유지되었다. 건물의 좌우 계단을 통해 2층에 오르면 알현실과 침실이 위치한다. 2층에서 베란다로 나가면 열 지어 세워진 기둥들 사이로 잘 정돈된 정원과 함께 중화전과 석조전 서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지향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경운궁의 대표적 건축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석조전이 완공된 시점에 대한제국은 국권을 일본에 빼앗겼다. 일제시기에 작성한 『순종실록』 부록의 기록에 따르면, 황위에서 물러난 고종은 석조전을 종친과 귀족을 비롯한 방문객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22년 5월 11일에는 영친왕의 첫 번째 아들인 왕손 이진(李晉)이 석조전에서 사망했으며(『순종실록부록』 15년 5월 11일), 다음 날 종친들과 석조전에서 그 장례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현재 석조전에 관한 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영친왕, 덕혜옹주가 함께 1층 홀에서 촬영한 사진이 잘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東亞日報)』
  • 『매일신보(每日申報)』
  • 안창모, 『덕수궁: 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동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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