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묘(檀君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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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시조 단군을 모시는 사당. 단군사(檀君祠)라고도 함.

내용

조선 왕조에서 단군을 제사하자는 논의는 건국 직후부터 있었다. 즉 1392년(태조 1) 8월 예조 전서 조박(趙璞) 등이, 단군은 동방에서 최초로 천명을 받은 군주이므로 처음 도읍했던 평양부에서 때에 따라 제사토록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실천으로 옮겨지지 못하다가, 1412년(태종 12) 평양에 기자묘(箕子廟)를 세우면서 여기에 단군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기자묘는 그 이름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기자가 중심이며, 단군은 부수적 존재였다. 단군이 기자의 사당에 더부살이하는 것은 단군과 기자의 건국의 선후만 보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1425년(세종 7) 단군 사당을 별도로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1429년(세종 11) 기자묘 옆에 단군묘(檀君廟)를 창건했다. 이때 단군묘에는 단군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도 함께 모셨다. 그래서 단군묘를 ‘단군동명왕사’라고도 했다. 단군이 주벽(主壁)이고 동명왕은 종향(從享)이었다. 단군묘가 건립되면서 단군의 신위도 ‘조선후단군지위(朝鮮侯檀君之位)’에서 ‘조선단군(朝鮮檀君)’으로 바꾸었고, 1456년(세조 2)에는 다시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로 개칭되었다. 이러한 사실과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과 환웅을 제사 대상에서 제외한 점으로 미루어, 단군이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인물로, 그것도 우리나라의 개국시조로서 모셔졌음을 알 수 있다.

단군묘는 국가 사전(祀典)에 중사(中祀)로 등재되었고, 국가제사이니만큼 제사는 국왕의 명의로 거행되었다. 그러나 국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한 것은 1460년(세조 6) 10월 한 차례뿐이고, 또 중앙에서 특별히 제관을 파견한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중앙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면 이를 받아 지방관이 국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연 2회로 2월과 8월에 길일을 택해 거행되었다.

단군묘는 1724년(영조 즉위) 평안감사 이정제(李廷濟)의 요청에 따라 ‘숭령전(崇靈殿)’으로 사액(賜額)되었다. 그리고 1728년(영조 5)부터 숭령전에는 참봉 2인을 두었는데, 숭령전 참봉직은 평안도 사람들이 중앙 관계로 진출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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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묘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 개수 또는 개축되었다. 특히 명나라 사신이 평양을 거치면서 들러 참배하는 곳이었기에, 국가 차원에서 유지 보수에 신경을 썼다. 1456년(세조 2)에 수리한 사실이 확인되며, 1804년(순조 4)에는 불타버린 것을 곧 복구했다. 16세기 말에 편찬된 윤두수(尹斗壽)의 『평양지』에 의하면, 단군묘는 정전 4칸·동행랑 3칸·서행랑 2칸·전직(殿直) 거처 2칸·대문 3칸·동서 협문 각 1칸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숭령전에는 정면 4칸(12.9m)·측면 3칸(9.2m) 겹처마 합각지붕의 정전과 대문만이 남아 있다. 정전을 4칸으로 한 것은 우리나라 옛 건축에서 앞면의 칸 수를 홀수로 하는 일반적 관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단군과 동명왕에게 각각 2칸씩을 할애했다고 하면 나름대로 설명이 가능하다. 현재 북한에서는 숭령전을 국보 유적 제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용례

天使到平壤 謁箕子廟 行四拜禮 又謁檀君廟 行再拜禮(『성종실록』 19년 3월 9일)

참고문헌

  • 『춘관통고(春官通考)』
  • 강만길, 「이조시대의 단군숭배」, 『이홍직박사회갑기념 한국사학논총』, 신구문화사, 1969.
  • 서영대 편, 「단군 관계 자료」, 『단군-그 이해와 자료』,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