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육(臘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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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향에 쓰는 희생 고기.

개설

납향(臘享)은 동지(冬至) 뒤 세 번째 미일(未日)에 종묘 등 조종(祖宗)의 신위에 희생(犧牲)을 바치고 한 해의 농사나 그 밖의 일을 고하는 제사였다. 납향에 사용하기 위해 지방관청에서 진상(進上)하는 산짐승의 고기를 납육이라 하였다. 납육을 진상하는 것을 납일(臘日)진상이라고도 하였다. 납육은 대개 생돼지[生猪]·생노루[生獐]·생꿩[生雉]·생사슴[生鹿]·생토끼[生兎] 등이었다. 이들 동물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민간에 여러 폐단을 야기하여 납육의 정기 진상에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영흥군읍지』나 화순읍지인 『서양지』에는 납육을 각각 진공방물(進貢方物) 또는 진공(進貢)이라 제목을 붙여 진상물선과 구분 없이 열거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 납육진상에 관한 기록은 “대전(大殿) 외 4전에 진상하는 납육을 반으로 줄여서 봉진하라.”고 한 실록 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성종실록』 4년 12월 3일). 이를 통해 1473년 이전에 대전을 포함한 5전에 납육이 진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25년(중종 20) 10월에는 납육 진상을 핑계로 수령이 백성을 동원하여 사냥하는 폐단을 엄금하였다.

납육은 대동법 시행 이후 공물화되어 선혜청의 공물가로 마련되었다. 각 도에서 진상해야 하는 납육을 공인을 통해 대납·봉진하는 형태로 바뀌어 간 것이다. 숙종 때에는 호서 지역의 납육을 서울에서 공납하도록 하였다. 1867년(고종 4) 편찬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강원대동청이 강원도감영을 대신하여, 각 궁에 강원도의 납육 값을 대납(代納)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납육을 변통하는 조치도 있었는데, 정조 때에는 사냥으로 인한 민폐를 고려하여 경기나 호남에서는 멧돼지·노루·사슴을 꿩으로 대신 바치도록 하였다.

형태

1728년(영조 4) 편찬된 『진상별단등록』에 의하면, 외공(外貢)으로 전라도 납육진상을 상납하는 곳은 대왕대비전·왕대비전·대전이었다. 진상하는 종류는 생돼지·생노루·생꿩·생사슴이었다. 이는 각 영의 유치미(留置米)로 직접 구입하여 상납하였다. 대왕대비전에는 생돼지 3마리, 생사슴 4마리, 생노루 5마리, 생꿩 70마리가 봉진되었으며, 왕대비전도 이와 같았다. 대전에는 생돼지 3마리, 생사슴 3마리가 상납되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1788년(정조 12)에는 강릉 지역의 꿩을 잡는 엽치군(獵雉軍)을 없앴다. 종전에는 강릉부가 포군(砲軍) 수십 명을 정하여, 납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중간에 포군 1명당 꿩 10마리씩을 대납하게 하였다. 포군에게 궐액(闕額)이 많으므로 엽치군을 혁파하도록 한 것이다.

참고문헌

  •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 Ⅲ , 일조각, 1988.
  •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 德成外志子, 「조선후기 공납청부제와 중인층공인」,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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