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면(龍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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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北宋)대 문인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號)이자, 조선시대 불화 화승(畵僧)에 대한 존칭.

개설

이공린은 중국 북송후기의 사대부 화가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안휘성(安徽省) 동성(桐城)용면산(龍眠山)에 은거하면서 용면(龍眼) 거사(居士)로 불렸다. 그는 시서화에 능하였는데 그의 산수화는 송나라 그림 중 최고라는 평을 받았으며 당나라 중기 후퇴하였던 필선만으로 그리는 백묘화(白描畵)를 부흥시켰다.

특히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불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가 그린 관음도(觀音圖), 나한도(羅漢圖) 등의 불화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것이었다. 이후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사대부 화가 중 1인으로 존경받았으며 조선후기에는 불화승(佛畵僧) 중에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용면이라고 칭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이공린은 1049년에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백시(伯時)이며 그의 아버지 이허일(李虛一)은 서예, 미술품 수집을 좋아하였다. 어릴 때부터 고서화를 보고 자란 그는 고미술품에 대한 남다른 감식안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화가들의 화법(畵法)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1070년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나 1100년에 오른손이 마비되는 병을 얻어 고향인 용면산에 은거하면서 말년을 보내다 1106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시서화에 모두 능했던 인물로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그 시기 이름난 문인인 소식(蘇軾), 왕안석(王安石), 황정견(黃庭堅)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그는 화원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가던 북송대 화단에서 문인의 신분으로서 말 그림, 산수화, 인물화, 불화 등의 화목을 다 잘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말 그림을 제일 잘 그렸던 것으로 알려진다. 많은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 진적으로는 「오마도권(五馬圖卷)」이 전한다.

사대부 화가였으나 불화도 잘 그렸던 이공린의 화풍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화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우리나라 불화의 초본은 이공린 백묘화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중기 문인이었던 허균(許筠)은 불화로 이름난 화가로 이공린과 오도자(吳道子)를 언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불화승의 우두머리를 그의 아호(雅號)인 용면이라고 칭한 것도 불화로 명성이 높았던 그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용면은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24년 3월 10일).

참고문헌

  • 장준석, 「이공린의 백묘화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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