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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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요계관방지도 |
한글표제 | 요계관방지도 |
한자표제 | 遼薊關防地圖 |
대역어 | 요계관방도(遼薊關防圖) |
관련어 | 관방지도(關防地圖),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 성경통지(盛京通志), 이이명(李頤命), 주승필람(籌勝必覽)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정은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32년 1월 12일 |
1706년에 이이명(李頤命)이 조선의 서북 경계인 청나라 요동과 계주 인근의 관방 형세를 그린 지도.
개설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명대의 지도책 『주승필람(籌勝必覽)』과 조선에서 해로를 통해 산동에 이르던 길을 그린 공로도(貢路圖), 서북쪽 강해(江海)의 경계, 그리고 심양의 지리지인 『성경통지』의 지도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후기 관방지도의 대표작으로, 숙종대 조선의 서북 지역과 중국의 국경을 중심으로 한 지리 인식의 확대를 잘 보여준다.
18세기 중반 이후 제작된 군현지도집인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 등에도 「요계관방도」가 삽입되어 있다. 이들 군현지도집에 포함된 「요계관방도」는 1706년 이이명의 「요계관방지도」를 모본(模本)으로 필사한 것이다.
내용 및 특징
이이명이 제작한 「요계관방지도」는 10폭 병풍 형식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다. 이이명은 자필로 제10폭에 주요 지역에 이르는 거리를 상세히 밝히고, 숙종에게 올린 차자(箚子)에서 밝힌 지도의 제작 경위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숙종실록』 32년 1월 12일).
제10폭의 주기에는 압록강부터 심양, 심양에서 북경에 이르는 거리를 기록하였고, 남으로 여순구(旅順口)까지와 동북으로 오라(烏喇)에 이르는 거리를 적었다. 오라 동남에서 영고탑(寧古塔)까지 거리와 영고탑 남쪽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거리를 적고 동북으로 흑룡강 해구(海口)에 이르는 거리를 리(里) 단위로 표기하였다. 또 북경의 북쪽에서 창평현과 경주에 연한 거용관까지 거리를 각각 적고, 북경 서북쪽에서 선부(宣府)까지 거리를 적었다. 그리고 선부에서 동북쪽으로 개평위(開平衛)까지 거리와 북경에서 등주까지 거리를 리 단위로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어지는 이이명의 글에 의하면, 지도는 이이명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올 때 가져온 명나라 선극근(仙克謹)의 『주승필람(籌勝必覽)』, 청나라에서 편찬한 『성경통지』의 오라지방도, 명말청초의 해로사행로, 서북쪽 강과 바다의 경계를 반영하여 제작한 사실을 밝혔다. 이이명은 지도의 제작 배경을 과거 오랑캐의 변고가 주로 동북에서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조선 역시 국토는 작지만, 변방의 경계는 넓고 먼 데다 서북 변방 지역은 강 하나로 경계를 짓고 있고, 산동과도 매우 가까워 경계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청나라가 심양과 영고탑에 성벽을 증축하는 점과 북방 지역의 사세(事勢) 등을 고려할 때 변방 접경지대의 방비에 힘써 미리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지도는 17세기 후반 새로 입수한 『성경통지』의 지리 정보를 잘 반영하였다. 조선은 관북 및 관서 지역만 그렸으며, 두만강의 남류 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었고,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가 지도에서는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지리지인 『성경통지』를 토대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동쪽 흑룡강에서 서쪽 산해관 사이 성첩과 만리장성을 그렸고, 요동반도와 요하의 산맥과 하천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특히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기 전에 고려의 윤관(尹瓘)이 동북의 여진을 축출하고 개척한 선춘령(先春嶺) 지역에 세운 고려경(高麗境)이라는 석비(石碑)를 고증하였다. 선춘령은 윤관이 새로운 영토로 개척하고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하여 『고려사』「지리지」에는 선춘령의 위치가 두만강 이북 700리, 약 275㎞ 지점이라고 되어있지만,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성경통지』의 지리 정보를 바탕으로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으로 수정하여 표시되었다.
육로는 통과 지점만을 표시한 것에 비하여 조선에서 산동반도와 산해관에 이르는 해로를 뚜렷하게 그렸다. 이는 17세기 전반 명청 교체기에 후금의 요동 점령으로 인해 육로가 막히자 조선의 사신단이 바닷길로 왕래하였는데, 주로 산동의 등주(登州)나 영원성 각화도(覺華島)에 이르는 길이 이용되었다. 이 밖에도 요새의 수비 상태를 지도 안에 특별히 기록해두고 있으며, 성의 망루에는 적색 깃발이 날리고 진(鎭)·관(關)·보(堡) 등은 적색으로 표시하였다.
변천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에 삽입된 「요계관방도」는 채색 필사본으로 명나라 말기 군사 시설과 방어 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지도의 원본이 『성경통지』 등 중국 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백두산과 주변 물줄기, 토문강 등 중국 동북 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 없이 수록되어 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등장하거나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이 지도에서는 반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도는 서북 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인식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지도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과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이이명의 「요계관방지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이 ‘고려경’으로 바뀌어 표기되었다.
한편 『여지도』의 「요계관방도」는 『해동지도』와 동일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해동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해동지도』의 맨 앞에 있던 주기(註記)가 이 지도에서는 모두 누락되었으며, 군현의 기호 표시가 잘못되거나 지명의 누락 부분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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