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안공주(淑安公主)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22일 (금) 01:42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636년(인조 14)~1697년(숙종 23) = 62세]. 조선 제 17대 임금인 효종(孝宗)의 딸로 공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장유(張維)의 딸로 효종의 정비(正妃)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친동생은 조선 제 18대 임금인 현종(顯宗)이다. 부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익평위(益平尉)홍득기(洪得箕)이다. 인조(仁祖)의 손녀이자, 숙종(肅宗)의 친고모이기도 하다.

출생 및 혼인 생활

숙안공주(淑安公主)는 1636년(인조 14) 효종과 인선왕후의 1남 6녀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다. 그러나 언니 숙신공주(淑愼公主)가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후 장녀 역할을 하였다. 1645년(인조 23) 큰아버지이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해 윤6월 당시 봉림대군(鳳林大君)이던 아버지 효종이 세자로 결정되었고, 그러면서 숙안공주는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 숙안군주(淑安郡主)로 봉작되었다.(『인조실록』 23년 윤6월 2일),(『인조실록』 24년 12월 25일)

그리고 1649년(인조 27) 4월 홍중보(洪重普)의 아들 홍득기와의 혼인이 결정되었다.(『인조실록』 27년 4월 9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인조의 삼년상이 거행되었다. 이런 경우 혼례를 삼년상 이후로 미루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1650년(효종 1) 숙안공주는 홍득기와 간소하게 혼례를 치렀다.(『효종실록』 1년 8월 4일) 이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화의 과정에서 청(淸)나라가 내건 조건들 가운데 하나인 ‘내외의 여러 신하들과 혼인하여 화친을 공고히 할 것’과 관련이 있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후 청나라의 예충친왕(睿忠親王)이 아내를 잃고 새로 혼인을 하려 하면서 이 항목을 들어 조선에 통혼을 요구하였던 것이다.(『효종실록』 1년 11월 5일) 이에 청나라의 요구를 피하고자 효종은 혼인 연령에 도달한 숙안공주의 혼인을 서둘러 진행하였다. 그리고 종친인 금림군(錦林君)이개윤(李愷胤)의 딸을 수양딸로 삼아 의순공주(義順公主)로 책봉한 후 청나라에 보내 예충친왕과 혼인 시켰다.(『효종실록』 1년 3월 25일),(『효종실록』 1년 4월 22일)

이후 숙안공주는 민전을 침탈한다든지 집의 규모를 매우 넓혀 보수한다든지 등의 문제로 여러 차례 탄핵과 소송에 휘말렸으나 아버지 효종, 남동생 현종, 조카 숙종 등의 비호를 받아 무사할 수 있었다.(『효종실록』 3년 11월 13일),(『현종실록』 3년 7월 13일),(『현종개수실록』 10년 9월 19일),(『숙종실록』 11년 12월 18일),(『숙종실록』 25년 3월 16일) 그런 가운데 숙종 대에는 남인(南人) 출신의 조사석(趙師錫)을 정승으로 임명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동생 숙명공주(淑明公主)와 함께 숙종을 찾아가 적절하지 않은 인사라는 언급을 하며 숙종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였다.(『숙종실록』 13년 9월 13일) 이는 숙안공주의 시가(媤家)가 서인(西人)인 것과 관련이 있었다. 남인과의 이러한 대립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 때까지 이어졌으며, 남인 사이에서는 숙안공주와 숙명공주 등을 살해하여야 근심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숙종실록』 20년 4월 1일),(『숙종실록』 20년 5월 23일)

한편 숙안공주는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숙청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은 지 3년이 지난 1697년(숙종 23)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숙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초상(初喪)에 참여하였다.(『숙종실록』 23년 12월 22일),(『숙종실록』 23년 12월 23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화전리에 있다. 부마 홍득기와 합장하였으며, 양평군 향토유적 제 28호로 지정되었다. 부마 홍득기는 익평군(益平君)에 봉해졌다가, 1673년(현종 14) 11월 세상을 떠났다.(『현종실록』 14년 11월 27일)

숙안공주는 부마 홍득기와의 사이에서 1남 홍치상(洪致祥)을 두었는데, 홍치상은 숙종 시대에 서인(西人)의 편에 서서 남인(南人)과 대립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당시 남인 측 인물인 장희빈(張禧嬪)의 어머니가 남인 조사석의 종이었고, 그 인연으로 조사석이 정승이 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숙종실록』 15년 2월 5일),(『숙종실록』 15년 윤3월 2일),(『숙종실록』 15년 윤3월 7일) 이에 그해 4월 홍치상은 교형(絞刑)에 처해졌으며, 그의 처조카였던 김영빈(金寧嬪)은 작호가 삭탈된 후 폐출되었고, 인현왕후(仁顯王后) 또한 폐비(廢妃)가 되면서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기로 결정하였다.(『숙종실록』 15년 4월 22일),(『숙종실록』 15년 4월 22일),(『숙종실록』 15년 5월 2일),(『숙종실록』 15년 5월 6일)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 『약천집(藥泉集)』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홍재전서(弘齋全書)』
  • 지두환, 『효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