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신(朴弘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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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73년(고려 공민왕 22)~1419년(조선세종 원년) = 47세]. 고려 말 우왕과 조선 초기 태조~세종 때에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좌군 병마사(左軍兵馬使)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아버지는 삼사(三司) 좌윤(左尹)박천경(朴天卿)이고, 어머니 위씨(魏氏)는 검교군기감수령(檢校軍器監遂寧)위윤경(魏允敬)의 딸이다.

고려 우왕 시대 활동

1384년(우왕 10)에 그의 나이 12세였는데, 이미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다. 장성하자 검교 중랑장(檢校中郞將)을 거쳐 산원(散員)으로 승진하여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의 막부(幕府)에 예속되었다. 1386년(우왕 12)에 별장(別將)이 되었는데, 그 뒤에 형 절제공(節制公)박언충(朴彦忠)과 같이 향리에 돌아왔다.

조선 태조~세종 시대 활동

조선이 개국하자 무예로 갑사(甲士)가 되어 금병(禁兵)에 예속되었다. 그 뒤 사직(司直)을 거쳐 호군(護軍)이 되었다. 1414년(태종 14) 4월에 제물량만호(濟物梁萬戶)가 되었다가 9월에 병산포만호(並山浦萬戶)가 되었고, 12월에 행사직(行司直), 삼군 진무(三軍鎭撫)가 되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쳤다. 1418년(태종 18)에 중직대부(中直大夫) 사재감(司宰監)정(正)이 되었고, 1419년(세종 1) 1월에 좌사금(左司禁)이 되었다. 이 해 6월 조정에서는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군사 1만 7천여 명과 전선(戰船) 2백 20여척을 거느리고 삼군(三軍)으로 나누어서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에 대신(大臣)들이 박홍신은 두 번이나 수군(水軍)을 거느려 보아 바닷길을 잘 안다고 하여 좌군 병마사(左軍兵馬使)가 되어 절도사(節度使)박실(朴實)에게 예속되었다. 형 박언충(朴彦忠)도 중군 병마사(中軍兵馬使)로서 함께 종군하였다. 대마도에 이르러 <이로군(尼老郡) 싸움>에서 6월 29일 전사하였다. 이때 나이 47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홍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모습이 보통 아이와 달랐다. 그의 큰 형인 박사자(朴獅子)가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요절하였기 때문에 부모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천성이 효성스러웠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몸이 풍대(豊大)하면서 성품이 관후하였으므로 사람을 접대하는 데 있어 항상 즐겁고 편안하였으며, 남에게 승낙을 잘하고 피차의 간격이 없었으므로, 항상 빈객(賓客)이 문에 가득하였다.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해상(海上)으로부터 이르자 온 향리의 대소(大小) 사람들의 곡성(哭聲)이 이어졌다고 한다.

묘소와 전

아들 박근생(朴根生)이 그의 의복을 밀양부(密陽府)의 동쪽 단양리(丹陽里)에 장사지냈는데, 자식도 없이 죽는 바람에 마침내 그 묘역(墓域)을 잃어버렸다. 부인 민씨(閔氏)는 삼사좌윤민위(閔暐)의 딸인데, 자식이 없고 남편보다 먼저 죽었다. 자식은 서자 박근생이 있다. 김종직(金宗直)이 전(傳)을 지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점필재집(佔畢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