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옹주(恭愼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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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1년(성종 12)~1549년(명종 4) = 69세]. 조선의 제9대 임금인 성종(成宗)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영월 엄씨(寧月嚴氏)엄산수(嚴山壽)의 딸인 엄귀인(嚴貴人)이다. 부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청녕위(淸寧尉)한경침(韓景琛)이다. 엄귀인에게 불만을 품은 연산군(燕山君)으로 인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에 옹주 작위를 박탈당하였다가, 중종(中宗) 대에 복작되었다.

출생과 혼인생활

공신옹주(恭愼翁主)는 1481년(성종 12) 성종과 엄귀인의 사이에서 태어나서, 한명회(韓明澮)의 손자이자 낭성군(琅城君)한보(韓堡)의 아들인 한경침(韓景琛)과 혼인하였다. 남편 한경침은 청령위에 봉해졌다. 그리고 성종은 공신옹주의 하가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었다.(『성종실록』 23년 6월 19일)

한편 공신옹주의 어머니 엄귀인은 성종의 또 다른 후궁인 정귀인(鄭貴人)과 함께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를 폐위시킬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은 엄귀인과 정귀인을 때려죽였으며,(『연산군일기』 10년 3월 20일) 공신옹주는 작위를 박탈당한 후 아산(牙山)으로 유배를 갔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6일),(『연산군일기』 10년 3월 27일)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공신옹주의 부마 한경침 또한 삭탈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6일) 그러다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中宗)이 즉위하면서 공신왕주의 작위는 회복되었다.

한편 공신옹주는 갑자사화로 집이 적몰될 때 남편의 신주를 안고 유배지에 가서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내고, 석방되어 돌아올 때 신주를 앞세워 왔다. 이에 중종은 공신옹주의 정려문을 세우게 하였다.(『중종실록』 1년 10월 27일),(『중종실록』 2년 6월 6일) 그러나 공신옹주의 정려문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울어지고 무너졌고, 이에 윤은보(尹殷輔)가 귀한 신분임에도 절행이 뛰어났다는 것을 들어 공신옹주의 정려문을 보수하고 진휼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중종의 허락을 받았다.(『중종실록』 10년 5월 21일) 이 외에도 중종은 공신옹주의 절의(節義)가 뛰어나다며 곡식을 하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강행실속록(三綱行實續錄)』에 옹주의 절의를 추가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 10년 6월 1일),(『중종실록』 13년 5월 7일),(『중종실록』 10년 6월 5일) 또 공신옹주가 유배를 갔을 때 뺏긴 인천(仁川) 삼목도(三木島)도 절조(節操)를 지켰다며 다시 돌려주었다.(『중종실록』 16년 10월 4일) 1549년(명종 4)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와 후손

공신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벌내 지구에 있다.

부마 한경침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지두환, 『성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