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유장(解由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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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원들이 전직(轉職)할 때 후임자에게 사무를 인계하고 호조에 보고하여 그 책임을 면제받는 문서.

개설

해유장(解由狀)은 지방 수령 등이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후임자에게 요청하여 받는 인수인계 완료를 확인하는 문서로 유장(由狀)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 문서상에 해유장이라고 기록한 예는 거의 없다. ‘해유(解由)’만으로도 인수인계를 확인하는 행위는 물론 그 문서까지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는 해유의 행위와 구별하기 위하여 문서의 경우 해유 문서 등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해유와 더불어 해유장·유장 등이 쓰이고 있으나 역시 해유만으로 문서까지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지칭한 사례가 많다.

내용 및 특징

해유는 재정 손실을 보전할 목적으로 확립한 관료 행정의 인수인계 규칙이라 할 수 있다. 철저한 행정 절차 주의를 유지해온 조선은 지방 관리가 이임할 때 여러 단계의 해유 절차를 마련하여 철저히 이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법전에 수록된 해유 관련 문서식과 현재 전하는 해유 문서를 통해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수령의 해유 절차를 살펴보면, 먼저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문서로 명세를 작성하여 인계한다. 이때 작성하는 것이 해유이관(解由移關)이다. 후임자는 전임자가 보낸 관문(關文)의 내용을 확인한 뒤 관찰사와 절도사에게 첩정을 올려 해유를 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것이 해유첩정(解由牒呈)이다.

후임 수령이 관찰사와 절도사 양쪽에 첩정을 올린 이유는 지방관의 해관 물건에 군기(軍器)·성자(城子)·선척(船隻) 등 병조 소관 업무에 해당하는 것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상급 관청에서는 이를 다시 검토하고 나서 각각 호조와 병조에 관문을 이송한다. 이 관문에는 후임자의 첩정을 덧붙인다. 호조와 병조가 이조에 관문을 보내면 여기서 조흘장(照訖狀)을 발부함으로써 해유의 절차가 완료된다.

해유이관식과 해유첩정식은 『경국대전』 문서식에 수록되어 있다. 그에 앞서 『경국대전』에는 평관식과 첩정식이 수록되어 있어 관부와 관부 사이에 주고받는 문서의 격식은 대체로 이 두 가지 형식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유이관식과 해유첩정식이 별도로 수록된 것은 해유 절차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해유장을 살펴보면, 해유 대상자가 후임자에게 보내는 관문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 이유는 관문을 받은 후임자가 관찰사와 절도사에게 첩정을 올릴 때 이 관문을 덧붙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후임자가 관찰사와 절도사에게 올린 첩정은 호조와 병조에 가는 관문에 덧붙이므로 실물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변천

해유라는 용어는 조선전기부터 『조선왕조실록』에서 쓰였으며, 『경국대전』에 해유이관식과 해유첩정식이 수록된 점으로 미루어 해유에 관한 행정 체계와 해유 문서식은 조선전기부터 정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해유이관의 경우 발급자와 소관 업무에 따른 경유 기관의 차이 등으로 인해 여러 형태의 문서식으로 분화하였다. 『경국대전』 이후의 문서식 분화 및 변화 내용은 『전율통보』의 해유이관식 등에 반영되어 있어 그 변화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해유 문서는 대체로 17세기 초에서 19세기 말 사이에 작성된 문서들이다. 해유 행정이 조선전기부터 정비되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15~16세기의 문서 현물이 전하지 않는 것은 매우 아쉽다. 현존하는 문서를 통해 보면 실제 해유 문서들은 대체로 법전의 문서식을 준수하면서도 미세하게 규정을 벗어난 부분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문서식보다는 문서의 내용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내용이 정확할 경우 문서 규식상의 잘못으로 인하여 해유가 중단되거나 관리들이 제척(除斥)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철저한 행정 절차 주의를 준수하면서도 절차상의 융통성을 발휘한 측면을 볼 수 있다.

의의

조선시대의 문서 행정이 매우 체계적이고 위계적이었다는 점은 공사(公私) 문서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특히 해유장은 이러한 조선시대 문서 행정의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해유 문서의 문서식 자체가 매우 상세하고 치밀하며, 실제로 문서식을 통해 문서를 주고받을 때 다섯 단계 이상을 거쳐야 해유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해유이관을 비롯한 각종 해유 문서는 실제 발급자의 소관 업무에 따른 경유 기관의 차이 등으로 인해 분화하기도 하고 원래의 문서식에서 미세한 변화를 수반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수용하여 『전율통보』에는 약간 변화된 양식이 반영된 문서식이 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율통보』 이후에도 실제 해유장은 법전의 규식 그대로 작성되지 않고 작성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었다.

원칙적으로 관리들은 재직 기간 동안의 과실로 인해 해유장을 받지 못한 경우 조사(朝謝)·녹패(祿牌)·가자(加資) 등에서 제척 사유가 되었다. 그만큼 정확한 인수인계와 그를 통한 해유장의 발급은 관리들에게 중요한 사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약간씩 변형된 형태로 해유 문서가 작성되어도 이것이 관리들에게 제척 사유가 되지는 않았다. 즉 조선 사회가 체계적인 문서 행정과 더불어 매우 융통성 있는 시스템을 유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전율통보(典律通補)』
  • 임민혁, 「조선후기 해유행정의 문서식과 그 실제」, 『고문서연구』 28, 2006.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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