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재(黜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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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성균관과 향교에서 재회(齋會)의 결정에 의하여 유생을 기숙사인 재(齋)에서 내쫓는 벌.

개설

출재는 성균관과 향교의 자치기구인 재회에서 학생에게 내리는 벌인 유벌(儒罰)의 하나인데, 비교적 가벼운 벌이었다. 시행할 때 글 없이 단지 말로 벌을 내리기 때문에 들어오라 권할 때도 역시 말로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유벌은 재회에서 결정되는데, 재회의 우두머리인 장의(掌議)가 유벌 결정을 주도하였다. 즉, 자치회의 임원인 재임(齋任)이 말을 꺼내면 수복(守僕)이 참석자들에게 공표하였다. 재임의 의견이 공론과 거리가 있더라도 참석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유벌의 종류는 먹으로 이름을 지우는 묵삭(墨削), 북을 치고 성토하면서 영구히 이름을 지우는 명고영삭(鳴鼓永削), 누런 종이를 붙여서 영구히 이름을 지우는 부황영삭(付黃永削), 영구히 학교에서 쫓아내는 영손(永損), 그냥 학교에서 쫓아내는 손도(損徒), 영구히 기숙사에서 쫓아내는 영출재(永黜齋), 그냥 기숙사에서 쫓아내는 출재(黜齋) 등이 있었다. 거재생(居齋生)이 재회에 잘 참석하지 않으면 혹 성균관 식당 출석 명부인 도기(到記)를 참고하여 출재의 벌을 내리기도 했다.

장의는 재회에서 벌의 명칭을 외치는데, 중벌일 경우 대개 영삭부황·영삭·영손 중 하나를 주었다. 벌을 주는 이유를 여덟 자(字)로 작성하였고, 그것을 기록한 후 색장(色掌)과 장의가 그 아래 서명하였다. 그러면 수복이 서쪽 첫째 방의 외벽 위에 갖다 붙였다.

벌을 풀어 주려면 벽 위의 별지를 떼어 와서 가장 나이가 적은 재생인 조사(曹司)에게 가위표(×)를 하도록 시켰다. 출재와 영출재의 경우에는 애초 글 없이 단지 말로 전하여 퍼뜨렸기 때문에 들어오라 권할 때도 역시 말로만 하였다.

변천

1754년(영조 30) 정언서명응(徐命膺)이 학교 교육 진흥 방안을 건의하였다. 그 요지는 3년마다 향숙(鄕塾)에서 행실이 바르고 식견이 트여 밝은 선비 한 사람을 가려서 그 고을의 학교에 추천해 올리고, 또 3년 뒤에 고을에서 각각 한 사람을 감영의 학교에 올리며, 또 3년 뒤에 여러 감영에서 각각 한 사람을 태학(太學)에 올리고, 대사성이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사서(四書)·오경(五經) 등 여러 책을 번갈아 고강(考講)하게 하는 것이다. 또 추천의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태학생의 품행과 재능의 고하를 살펴서 혹 행실이 비열하고 패려하여 한갓 어지러이 다투는 것만 일삼는 자가 있으면 대사성이 곧 초기(草記)하여 출재하되 추천자인 감사·수령·훈장도 함께 벌을 주었다. 반면에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닦인 자가 있으면 대사성이 3년마다 연말에 이조(吏曹)·병조(兵曹)에 천거하여 보내 교관(敎官)·세마(洗馬) 등의 벼슬에 보임하였다[『영조실록』 30년 7월 3일].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반중잡영(泮中雜詠)』
  • 『태학지(太學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