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사(賢聖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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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왕건이 개성에 창건한 절.

개설

태조왕건은 수도를 개경으로 옮기면서 개경십찰(開京十刹)을 비롯하여 재위 기간 동안 26개 이상의 절을 창건하였다. 고려의 이른바 ‘국가불교’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현성사(賢聖寺)는 국가의 기도도량으로 창건되어 이후 기우도량[祈雨道場],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 등 다양한 재(齋)가 개설되었다. 15세기 초까지 존속하다가 1530년(중종 25) 이전에 폐사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고려초인 936년(고려 태조 19)에 태조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현성사(現聖寺)였다. 같은 해에 개성의 왕궁 인근에 광흥사(廣興寺), 미륵사(彌勒寺), 내천왕사(內天王寺)를, 논산에는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하였다. 태조왕건(王建)은 불교를 신앙하고 외호하여 많은 사찰과 탑을 건립하였다. 고려의 건국은 부처님의 가피 덕분이라 선언하고 다양한 시책을 폈다. 건국 이후 수도를 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길 때 궁궐, 관청과 함께 수도에 법왕사(法王寺)와 왕륜사(王輪寺) 등 10사를 창건하였다. 숭불 시책은 단순한 신앙의 차원뿐만 아니라 신왕조의 기반을 단단히 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오랜 전란 동안 서로 다른 정치 세력으로 분열된 사회를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하나의 정신적 귀의처가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현성사는 국립 사찰로서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도량으로 번성하였다. 1130년(인종 8) 모든 관료들에게 쌀을 차등 있게 징수하여 현성사와 영통사(靈通寺)에서 국가를 위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재(齋)를 올렸다. 1176년(명종 6)에는 절 이름의 ‘현(現)’이 고려 18대 왕 의종(毅宗)의 이름[晛]과 발음이 같다고 하여 ‘현(賢)’으로 고쳤다.

1217년(고려 고종 4)에는 왕이 참가한 가운데 문두루도량을 개설하였다. 문두루도량은 신라 때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처음 시행되었는데, 오방신(五方神)을 모시고 주문을 외우면서 각종 재액이 소멸되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특히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국가의 안녕을 가져온다고 하여 외침이 있을 때 주로 시행하였다. 이 무렵 몽고의 침탈이 극성하고 있었다. 이후 절에서는 기우제를 여는 등 다양한 재와 의식이 계속되었다. 1297년(고려 충렬왕 4)에는 충렬왕의 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치병 기도가 열렸는데 며칠 후 공주는 이 절에서 서거하였다. 절은 수도 개성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현성사를 소재로 한 시로 고려말의 문신 이강(李岡)의 「여제공회현성사봉두(與諸公會賢聖寺峯頭)」와 김구용(金九容)의 「회현성사피서(會賢聖寺避暑)」가 전한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 들어서도 절은 기도도량으로서의 기능을 계속하였다. 1395년(태조 4) 국왕은 사신을 총지사(摠持寺)와 현성사 등에 보내 자연의 변고를 제거하는 재를 열도록 하였다(『태조실록』 4년 4월 25일). 1400년(정종 2)에는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자, 절에서 기양문두루도량(祈禳文豆屢道場)을 7일 동안 열어 이를 물리치는 기도를 올렸다(『정종실록』 2년 3월 15일). 100여 년 전 고려 이래의 문두루도량 전통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이후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폐사되었고,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터가 탄현문(炭峴門) 안에 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철성련방집(鐵城聯芳集)』
  • 『척약재집(惕若齋集)』
  • 김영태, 「고려 태조의 개경십찰 창건과 그 사상성」, 『불교사상사론』, 민족사, 1992.
  • 한기문, 「고려사원의 구조와 기능』, 민족사, 1998.
  • 한기문. 「고려 태조의 불교정책 : 창건 사원을 중심으로」, 『대구사학』22, 대구사학회,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