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모론(廢母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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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대에 광해군의 계모가 되는 인목대비를 폐하기 위해 한 논쟁.

개설

인목대비는 선조 35년에 19세의 나이로 51세의 선조와 결혼하여 계비가 되었다. 이에 따라 광해군과는 어머니와 아들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광해군 즉위 후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 사건으로 인해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강하게 대두하였고, 인목대비는 결국 폐서인(廢庶人)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내용 및 특징

인목대비의 폐모론인 서궁고폐(西宮錮廢)는 광해군 생모 공빈김씨 추숭(追崇) 사건과 맥을 같이 한다. 세자로 책봉되었던 광해군의 지위가 불안해진 것은 1606년(선조 39)에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동복형인 임해군은 광해군이 명나라에서 왕세자 책봉을 받지 못한 것을 내세워 스스로 왕세자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였고, 인목대비는 자신이 낳은 어린 적자 영창대군으로 왕세자를 바꾸려 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지 5년 후인 1613년 칠서(七庶)의 옥(獄)을 계기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고 하여 사사(賜死)되었고, 영창대군도 강화도에 안치되었다가 살해되었다. 인목대비의 폐모론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대북파의 수장인 이이첨이 앞장섰다(『광해군일기』 5년 5월 25일). 서양갑의 공초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입에서 대비와의 관련이 언급되었지만 인목대비를 연루시키는 것은 쉽지 않아 폐모 논의는 매우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광해군도 처음에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견지하였다.

대비의 폐모 폐출 논의는 1618년 2월까지 만 5년을 끌었다. 특히 1617년 정월부터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1년여를 다투면서 정국을 온통 파탄의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기자헌·이항복 등 몇몇 대신들만 신중한 처사를 건의하였을 뿐 압도적인 다수 인원이 인목대비의 폐비와 출송(黜送)을 주장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1월 4일).

1618년 1월부터는 백관이 정청(庭請)에 참여하여 매일 3회씩 왕에게 대비의 폐출을 주청하기를 26일간이나 지속하기도 하였다. 이때 정청에 참여한 관원은 약 78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러 가지 강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내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그 후 대부분 탄핵을 받고 유배되거나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1618년 1월 인목대비의 죄를 거론하며 폐위 삭출하는 절목이 결정되었다(『광해군일기』 10년 1월 30일).

또한 인목대비의 폐모론은 광해군의 생모 공빈김씨의 추숭과 짝하여 이루어졌다. 공빈김씨에 대한 추숭 작업은 인목대비에 대한 격하 작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광해군은 공식 석상에서는 인목대비를 모후나 자전(慈殿)으로 불렀지만 왕위에 오른 후 생모 공빈김씨를 왕후로 추숭하기 위해 오랫동안 추진해 왔다. 결국 명나라 황제가 광해군의 주청(奏請)을 받아들여 공빈을 왕비로 사후 책봉한다는 허락을 한 후 광해군은 더 이상 인목대비를 모후라고 부르지 않고 대비라고만 불렀다. 생모 공빈김씨가 공성왕후로 책봉되고 관복이 내려진 후 광해군의 모후는 인목대비가 아니라 공성왕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폐위론자나 폐위 반대론자를 막론하고 신료들은 모두 인목대비를 모후나 자전으로 불렀는데 공성왕후의 추숭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된 직후부터 폐위론자들은 대비를 서궁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해 폐위 반대론자들은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어머니임을 강조하기 위해 모후나 자전이라는 호칭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자주 사용하였다. 결국 인목대비의 폐모론은 공빈의 추숭 과정과 짝하여 더 심해졌고, 공빈의 추숭은 광해군의 모후 교체 즉 인목대비의 폐모로 이어졌다.

변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 이이첨을 비롯해 폐모론을 주장한 사람들은 사형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영춘, 『조선 후기 왕위 계승 연구』, 집문당, 1998.
  • 계승범, 「공빈 추숭 과정과 광해군의 모후 문제」, 『민족문화연구』48,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