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궁고폐(西宮錮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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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때 인목대비 김씨가 서궁에 유폐된 사건.

개설

인목대비(仁穆大妃) 김씨(金氏)는 선조의 계비이다. 1602년(선조 35)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았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이에 1618년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었다.

역사적 배경

인목대비는 영돈녕부사김제남의 딸로서 19세에 51세의 선조와 결혼하여 계비가 되었다. 이때 세자인 광해군은 29세로 적장자가 아닐 뿐 아니라 명(明)의 책봉도 받지 못했다는 명분상의 약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인목대비가 1606년(선조 39)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게 되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로 나뉘어 겨루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소북파는 몰락하고 대북파가 득세를 하게 되었다. 대북 정권은 광해군의 형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고 유영경 등을 파면시켰으며, 왕권을 위협하는 첫번째 인물로 영창대군을 지목하였다. 서자 출신이자 둘째 아들로 왕위 계승상의 정통성을 갖지 못한 광해군에게 적자인 영창대군은 왕권을 위협하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발단

1613년에 동래 은상(銀商)의 살해 사건으로 시작된 박응서의 옥사는 국구(國舅)인 김제남이 음모하였다는 식의 모반 사건으로 비화하였다. 여기에 영창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공초들이 나와 김제남과 영창대군은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대비는 유폐, 즉 고폐(錮廢)되었다.

경과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인 후에 대비를 연루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서양갑의 공초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입에서 대비의 관련이 언급되었으나 논의는 매우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광해군도 처음에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견지하였다. 대비의 폐출 논의는 1618년 2월까지 만 5년을 끌었다. 특히 1617년 정월부터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1년여를 다투면서 정국은 온통 파탄의 분위기였다[『광해군일기』 9년 1월 10일]. 기자헌 등 몇몇 대신들만 신중한 처사를 건의하였을 뿐 압도적인 다수의 관리들이 인목대비의 폐비와 출송(黜送)을 주장하였다.

1618년 1월부터는 백관이 정청(庭請)에 참여하여 매일 3회씩 왕에게 대비의 폐출을 주청하기를 26일간이나 지속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1월 1일] [『광해군일기』 10년 1월 26일]. 이때 정청에 참여한 관원은 약 780여 명에 이르렀다. 마침내 1618년 2월 4일에 폐위 삭출 절목이 결정되어 종묘에 고하고 전국에 반교문이 반포되었다[『광해군일기』 10년 2월 4일]. 대비는 전에 받았던 모든 의물(儀物), 즉 존호, 인장, 책명, 고신 등을 압수당하고 왕족으로서의 특권과 대우를 박탈당하였다. 이로써 인목대비는 대비의 지위를 상실하고 서궁인 경운궁에 유폐되었다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신원이 회복되었다[『인조실록』 1년 3월 13일].

그러나 폐출의 절차를 완전히 마치기 위해서는 황제에게 주청하여 황제의 명으로 책봉을 회수하고 폐서인(廢庶人)의 조치를 받아야 했으나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인목대비는 폐출되지 않고 왕후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영춘, 『조선 후기 왕위 계승 연구』, 집문당, 1998.
  • 신봉승, 「폐모(廢母), 살제(殺弟)의 진상」, 『한글한자문화』13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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