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급둔전(戶給屯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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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대 토지 분급 없이 봄에 종자(種子)만 지급하고 가을에 수확의 일부를 받았던 둔전 운영 방식.

개설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둔전제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왕조 정부는 고려말 이래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선군(船軍)의 역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하여 이들의 잡역 일체를 폐지해 주는 안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선군의 군역 활동에 소비되는 군량을 마련하는 것은 여전히 문젯거리였다. 1407년(태종 7) 의정부는 둔전·사원전· 황무지 등에 일반민을 동원하여 경작하고 여기서 나는 수확물을 선군의 양식으로 조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토지의 확보는 용이하지 않았다. 결국 파종할 수 있는 종자를 지급하고 수확의 일부를 둔전세로 납부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호급둔전은 폐지되었다가, 1409년(태종 9) 다시 부활하였다. 진휼이나 군량미의 확보를 명분으로 실시된 이때의 호급둔전은 호적에 편제된 농민[編戶]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고, 이를 바탕으로 종자 지급량에 차등을 두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호급둔전의 수탈적 성격은 여전하였고 결국 1414년(태종 14) 폐지되었다.

내용 및 특징과 변천

고려후기에 접어들어 둔전은 권력층이 겸병하여 수세하는 대상이 되었고, 이에 따라 둔전제는 붕괴되어 갔다. 고려 정부는 이에 대해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단지 세원을 색출하는 데에만 주력하였다. 그것은 가호둔전(家戶屯田)이라는 형태로 농민에게 종자만 지급하고 그 몇 배를 추수 때 징수하는 방식이었다. 충순왕 무렵 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호둔전은 농사의 풍흉이나 토지의 비옥도와 무관하게 수탈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어 이로 인하여 농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샀다. 결국 1375년(우왕 원년)에 철회되었다.

둔전제에 대한 개혁은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이루어졌다. 1392년(태조 원년) 이성계는 음죽 지역을 제외하고 국둔전(國屯田)을 모조리 폐지하였다. 이때 포(浦)·진(鎭)에 설치되었던 둔수군(屯戍軍)의 둔전이 함께 폐지되었으나 얼마 후 다시 복구되었다. 특히 고려말 이래 왜구 격퇴에 큰 공로를 세운 선군들은 왜구의 침입이 잦아들자 본래의 군무(軍務) 이외에 온갖 잡역에 동원되고 있었다. 왕조 정부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선군의 잡역 일체를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였으나 여기에는 이들의 군량 확보라는 문제가 놓여 있었다.

1406년(태종 6) 정부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고려말의 가호둔전법을 호급둔전이라는 형태로 부활시켜 해결하려 하였다. 정부는 호급둔전을 통하여 선군의 군량 확보는 물론 주현과 포진의 둔전 경영에서 발생하는 폐해를 제거하려는 의도도 가지고(깔려) 있었다. 이듬해인 1407년(태종 7) 정월 의정부는 폐지된 각급 관청과 포진의 둔전, 혁파된 사원전, 개간 가능한 황무지 등 일반 사유지가 아닌 일체의 토지를 일반민을 동원하여 경작하고 그 수확을 선군의 양식으로 지급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토지가 지급된다는 점에서 고려말의 가호둔전과는 차이가 있지만, 군무가 있을 때는 군사로, 없을 때는 토지경작에 동원하는[且戰且耕] 원칙이 폐기되고 민을 동원하여 경작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였다.

호급둔전은 시행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특히 10호당 50복씩 토지를 지급하기로 한 애초의 계획은 계속해서 장벽에 부딪혔고 결국 애초의 계획은 포기되고 50복의 토지에 파종할 수 있는 종자 약 10두를 분급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태종실록』 7년 7월 2일). 농민들은 종자만 지급받고 그 수확을 둔전세로 납부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원래 경작하는 토지 외에 새로운 농지를 개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농민들의 극심한 저항은 예정된 일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조정에서도 왕과 관료간의 논란이 계속되었다.

결국 같은 해 6월 사간원의 상소를 계기로 태종은 자신의 고집을 꺾고 호급둔전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로부터 1년여가 지난 1409년(태종 9) 호조의 제안에 따라 호급둔전은 다시 부활하였다. 진휼이나 군량미의 확보를 명목으로 실시된 이때의 호급둔전은 각호(各戶)를 편제하여 종자 지급량에 차등을 두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호급둔전을 ‘편호영전(編戶營田)’이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각호는 토지 소유와 노동력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등급이 매겨졌고 호등(戶等)에 따라 종자 분급량은 차이가 있었다(『태종실록』 6년 11월 17일). 이는 개별 호의 사정을 보다 충실하게 반영하여 운영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분급하는 종자에 대비해 수취액은 5배에 달하여 그 수탈성은 여전히 치명적인 문제였다. 농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논의 경우는 수확량의 반을, 밭의 경우는 거의 전량을 납부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농민은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른 저항도 격렬하였다(『태종실록』 9년 12월 21일). 결국 이듬해인 1410년(태종 10)부터 지역별로 호급둔전의 실시가 중지되기 시작하였고 1414년(태종 14) 마침내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이경식, 『조선전기토지제도연구』 (2), 지식산업사, 1998.
  • 이종영, 『조선전기사회경제사연구』, 혜안,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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