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정력(七政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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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정(七政)의 위치를 28수(宿) 속에 나타낸 역서.

개설

『칠정력(七政曆)』은 일반 상용 역서를 고치는 근본이 되는 용도로 편찬되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역서가 아닌 진상(進上) 용도로 1~2건 정도 아주 적은 수량이 제작되었다. 조선후기 시헌력(時憲曆)이 도입된 이후에는 시헌력법에 의거한 『칠정력』이 편찬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역서는 수록된 기간과 용도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분류된다. 즉, 『내용삼서(內用三書)』, 『시헌서(時憲書)』와 같이 매년 발행되어 사용되는 1년 단위의 역서와 『천세력(千歲曆)』, 『백중력(百中曆)』과 같이 10년마다 한 번씩 개정되는 100여 년 단위의 역서, 그리고 『칠정력』과 같은 『천체력(天體曆)』 등이 있었다. 『칠정력』은 칠정의 위치를 28수 속에 나타낸 역서로 일반 상용 역서를 고치는 근본이 되는 까닭에 그 중요성이 매우 컸다. 『칠정력』이 역서 편찬에 기본이 되는 점은 관상감(觀象監)에서 별자리에 관해 아뢰면서, 『칠정서(七政書)』는 곧 『시헌서』가 거기에 의거하여 나온 것으로 그 열수(列宿)의 차제(次第)를 서로 다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관상감의 관원인 안국빈(安國賓) 등에게 천상(天象)을 관측하고 증험하여 거도를 조사하여 정하게 했는데 그 추주법(推籌法)이 아주 가까운 것 같다고 언급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영조실록』 29년 5월 6일).

조선시대 『칠정력』의 간행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시헌력의 도입으로 시헌법을 바탕으로 한 『칠정력』이 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칠정에 대한 추보법(推步法)을 익히지 못해 『시헌서』의 간행보다 50여 년이 늦은 1707년(숙종 33)부터 간행되었다. 시헌력법으로 계산된 『칠정력』이 인쇄된 것은 1707년으로 추측되지만, 그 전해인 1706년에 인쇄본이 아닌 사본(寫本)으로서 시헌칠정력이 진상되었다고 한다(『숙종실록』 32년 10월 27일).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와 달리 『이재난고(頤齋亂藁)』에는 1709년과 1710년의 『칠정력』이 시헌력으로 간행되었다고 하여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변천

『칠정력』이 우리 역사에서 처음 제작된 것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세종대에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1443년(세종 25)에 『칠정력』을 만들었으나, 술법이 완전하지 않아 중국 칠정력과 차이가 나 중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칠정력』의 역명(曆名)은 『시헌서』와 마찬가지로 조선후기에 들어와 『칠정서』로 개칭되었다.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이 편찬된 이후에는 내편법에 의거하여 『칠정력』을 간행했고, 시헌력이 도입된 이후에는 시헌력에 의거한 『칠정력』이 편찬되었다. 『칠정력』의 간행 중단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태양력이 사용된 1896년 직전까지 편찬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 『서운관지(書雲觀志)』
  • 『이재난고(頤齋亂藁)』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이은성, 『曆法의 原理分析』, 정음사, 1985.
  • 정성희, 『조선후기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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