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推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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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하여 숨었거나 천적에서 누락되어 파악되지 않는 노비를 찾아내 관리 가능한 조건하에 두는 것.

개설

추노(推奴)는 신역(身役)을 피하기 위해 도망했거나 노비 소유주의 파악 범위를 벗어난 노비를 찾아내어 역(役)을 부과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공노비의 경우 국가적 차원에서 법제를 마련하여 추쇄(推刷)를 시행하였고, 사노비는 노비 소유주가 임의로 하였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노비의 신분적 제약이 약화되고 경제적 자립도가 높아지면서 추쇄는 점차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노비를 추쇄한다는 말을 간단히 줄여 추노(推奴)라 한다. 조선초기부터 공노비에 관해서는 노비 관리 전반에 관한 법제가 정비되어 있었다. 추쇄 역시 이러한 노비 관리 방안 중 하나이다. 노비 관리를 위한 법제는 『경국대전』에 규정된 천적(賤籍)의 작성과 관리, 도망 노비의 처리와 방지 대책, 사망 노비의 처리와 허위 신고자 처벌, 도망 노비 신고에 대한 포상, 노비를 숨겨 주거나 부린 자에 대한 처벌 조항 등을 말한다. 반면 사노비의 경우에는 노비 관리에 대해 공노비의 부수 조항으로 삽입되어 있을 뿐 별도의 규정은 없었다. 따라서 사노비 추쇄는 전적으로 노비 소유주가 담당하였고, 그 이유로 공노비에 비해 더 적극적으로 시행된 면이 있다. 태종(太宗)이 사노비 소유주는 추쇄를 매우 잘 하지만 공노비는 관리가 마음을 쓰지 않아 추쇄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이를 죄 주고자 한다고 언급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태종실록』 13년 7월 21일).

공노비 추쇄에 관해 살펴보면, 공노비는 3년에 한 번 속안(續案)을 작성하고 20년마다 정안(正案)을 작성하도록 『경국대전』에 규정되어 있었다. 3년마다 출생과 사망은 물론 그들의 이동 현황이 파악되도록 한 것이다. 이후 각사노비(各司奴婢)의 경우 식년(式年)마다 추쇄하고, 내노비(內奴婢)는 10년을 한하여 추쇄하도록 하는 규정이 『속대전』에 수록되었다. 조선전기부터 노비추쇄도감(奴婢推刷都監)을 두어 노비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추쇄를 담당해 왔다. 이는 역으로 신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하거나, 노비안(奴婢案)에서 누락되는 노비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노비의 이탈은 계속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에 공노비 감소를 막고 일정 수준의 노비를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추노 방안이 마련되어, 1655년(효종 6)에 다시 추쇄도감을 설치하게 되었다. 당시 천적에 수록된 노비 19만여 명 중 실제 신공(身貢)을 거두는 노비는 겨우 27,000여 명에 불과하다는 우려가 조정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효종은 추쇄어사(推刷御使)를 파견하고, 각 지방 수령들에게도 엄칙(嚴勅)을 내려 추쇄 사업을 독려하였다. 추쇄 사업은 1657년(효종 8년) 6월에 마무리되었는데 결과적으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이미 노비는 조선전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속성이 약화되고 경제적 자립의 정도도 높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조대 이후 추쇄관을 내려 보내는 것이 폐지되고 비총법(比摠法)을 채용하게 되었다. 신공량(身貢量)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인 동시에 중간에서의 부정을 막기 위해 추쇄를 해읍(該邑)에서 실시하게 된 것이기도 했다.

한편 사노비의 경우, 면천(免賤)·속량(贖良)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도망하거나 은루(隱漏)하여 양인 신분을 모칭하는 일이 행해졌다. 상전에게서 도망하여 다른 양반에게 투탁(投托)하는 경우도 있고, 양반들도 적극적으로 노비를 숨겨 주거나 하여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도 했다. 사노비의 추쇄는 노비 소유주가 하는 것이지만 관의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유주는 노비 추쇄의 근거 자료를 확보하고, 도망·은루 노비의 이름과 도망 시기, 현재 거주지, 도망시킨 자, 숨겨준 자의 성명과 거주지 등을 파악하였다. 이를 토대로 관에서는 증거 문기를 공증해 주고, 상급 관청에서는 사실의 정당성 여부를 조사하였고, 추쇄의 정당성이 확인되면 하급 관청에 추쇄의 실무를 지시하였다.

조선후기가 되면 노비들의 도망이 확대된 만큼 노비주의 추노 역시 매우 적극적이 되면서 많은 폐단이 뒤따랐다. 노비주는 양반의 위세와 관가의 힘을 빌려 오래된 문서만을 가지고 추노하거나, 자기 노비와 이름만 같아도 자기 노비로 추쇄하기도 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이미 방량(放良)한 노비를 다시 추쇄하거나, 양인을 자기 노비라고 주장하며 추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국가에서는 사노비 추쇄에 규제를 가하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사노비의 신분적 제약은 상당히 완화되었다.

변천

공노비 추쇄와 관련한 추쇄도감은 1655년(효종 6)에 마지막으로 설치되었다. 이후 사노비(寺奴婢)에 대한 추쇄관 파송이 폐지되고 비총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내노비(內奴婢)에 대한 추쇄관 파송도 폐지되었다. 추쇄관을 보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공노비 추쇄를 지방관의 책임하에 실시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했다. 노비 추쇄관의 혁파와 비총법의 실시는 오히려 노비 신분층에 대한 법제적 구속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노비들은 보다 용이하게 노비 신분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되어 노비제는 재검토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안승준, 『조선 전기 사노비의 사회 경제적 성격』, 경인문화사, 2007.
  • 전형택, 『조선 후기 노비 신분 연구』, 일조각, 1989.
  • 지승종, 『조선 전기 노비 신분 연구』, 일조각, 1995.
  • 平木 実, 『조선 후기 노비제 연구』, 지식산업사,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