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역(丁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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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개별 민가에 속한 장정 수를 기준으로 징발한 요역.

② 군역과 같이 개별 인정에 부과된 신역.

개설

중종대의 기록에 의하면, 함경도 지역의 요역은 정역(丁役)으로 부과되었다(『중종실록』 12년 9월 22일). 다른 지방과 달리 이곳에서는 전결(田結)이 아니라 장정을 헤아려서 역부를 징발하는 세종대 이전의 방식이 늦게까지 고수되고 있었다. 함경도의 일부 지역에서는 조선왕조 성립 이후에도 오랫동안 휴한농법(休閑農法)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농업생산력의 낙후성은 요역 수취 방식에도 영향을 주어, 개별 민가 내의 장정 수를 기준으로 노동력을 징발하는 방식을 유지하게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 세종대 이후의 요역제는 개별 민가에서 보유한 노동력이 아니라 사유지의 면적을 기준으로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상경연작농법(常耕連作農法)이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역에서 달성되면서 휴한(休閑)을 감안한 전세 수취의 차등제가 필요 없게 되었다. 따라서 결부제(結負制)로 파악되는 전국의 토지는 일정한 전결마다 일정량의 소출을 예상할 수 있게 하였다. 토지는 조세와 부역의 원천이자 개별 민가가 보유한 부(富)의 척도로써 균일성을 갖는 지표로 인식되었다. 더욱이 백성들이 유리하고 도망하는 일이 빈번하던 시기에, 토지는 달아날 수 없는 부세의 원천이 될 수 있었다. 성종대에 제정된 역민식(役民式)과 『경국대전』의 요역 규정은 토지를 기준으로 한 징발의 원칙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함경도 지역에서는 16세기 중엽인 중종대에 이르기까지 장정을 헤아려 일꾼을 징발하는 방식을 취하였으며, 이를 정역이라 불렀다. 함경도 지방의 요역이 다른 지방과 달리 개별 민가가 보유한 인정(人丁)의 수를 기준으로 요역을 징발한 것은, 이 지역의 생산력 수준이 낮고 특히 휴한의 세역농법(歲易農法)을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세조대 보법(保法)의 논의 과정에서, 이 지역은 다른 도에서 행하는 전준정법(田准丁法)이 적용될 수 없었다. 결국 계전작정(計田作丁), 즉 전결을 군역 자원으로 파악하려 했던 보법 시행 초기의 새로운 규정을 함경도 지방에서는 적용하지 못하였다.

16세기의 함경도에서는 토지보다는 노동력이 부의 척도로 인식되었으며 조세를 부담할 수 있는 능력의 지표로 이해되었다. 토지 생산성을 높이는 노동 집약적 영농 방식이 비교적 늦게 도입·적용되었던 북부 지방의 농업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함경도에서는 정역의 요역 징발 뿐 아니라, 진읍(鎭邑)에서 필요한 잡물의 장만을 모두 백성에게 요구하였다. 장정을 헤아려 물고기를 가져가는 것을 정어(丁魚)라 하고(『중종실록』 11년 5월 17일), 장정을 헤아려 닭을 가져가는 것을 정계(丁鷄)라 하며, 장정을 헤아려 술을 가져가는 것을 정주(丁酒)라 하였다(『중종실록』 32년 12월 19일). 함경도의 무거운 정역에 대한 기록은 조선후기 현종대에까지 이어졌다. 함경도 주민들이 정역을 괴롭게 여겨 아들을 낳아도 기뻐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조정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한편 정역은 요역 자체를 나타내는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다. 장정을 차출하는 역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었다. 또 군역과 같이 개별 인정에 부과된 신역을 정역이라 지칭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 정역의 용례는 조선초기부터 후기까지 있었다.

변천

조선 세종대 이후 요역은 토지를 기준으로 하였다. 함경도 지방과 같이 휴한농법이 남아 있던 지역에서만 일부 정역을 시행하였다. 함경도에서는 정역이 16세기 이후까지도 오랫동안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이정희, 『고려시대 세제의 연구: 요역제도를 중심으로』, 국학자료원, 2000.
  • 강제훈, 「조선초기 요역제에 대한 재검토: 요역의 종목구분과 역민규정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145, 1995.
  • 김종철, 「조선초기 요역부과방식의 추이와 역민식의 확립」, 『역사교육』 51, 1992.
  • 박종진, 「고려시기 요역의 징발구조」, 『울산사학』 5, 1992.
  •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요역제 부역노동의 해체, 모립제 고용노동의 발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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