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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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에 물을 부어 곡식 알갱이가 푹 무르도록 오래 끓인 음식.

개설

쌀, 조, 율무 등의 곡식에 물을 5~6배 이상 넣어서 오랫동안 끓여서 만든 유동식이다. 곡식을 씻어서 불린 후 끓이기도 하지만 곡식에 채소나 종실류, 육류, 약이성 재료 등의 부재료를 섞어서 쑤기도 한다. 죽의 농도와 쑤는 방법에 따라 죽, 미음, 응이, 암죽 등으로 나뉜다. 조선에서는 상(喪) 중에 있을 때 식사 대용으로 먹었고, 그 밖에 환자식·보양식·구황식 역할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죽(粥)은 도정 기술이 없었던 원시농경 사회에서 갈돌과 갈판에 의해 가루 낸 곡식을 활용하여 끼니를 해결하던 가장 초기의 식사 방식이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쌀을 물에 넣고 끓이는 것을 죽이라 한다. 된 죽을 전(饘), 묽은 죽을 죽, 뻑뻑한 죽을 조(稠), 맑은 죽을 이(酏)라고 한다. 이와 호(餬)와 독(食+蜀)은 모두 죽의 별명이다.”라고 하여 죽을 농도별로 분류하였다. 40종의 죽을 쑤는 법을 싣고, 옛날에 곡물·채소·약물로 죽을 쑤어 병을 치료하는 예가 많았다고 하며 여러 가지 죽의 치료 효과에 대해 열거하였다. 궁중에서는 흰죽, 우유죽, 잣죽, 깨죽, 흑임자죽, 행인죽 등을 많이 올렸다.

미음은 멥쌀만을 고은 걸쭉한 곡정수(穀精水), 차조·인삼·대추·황률 등을 오래 고아서 체에 밭친 차조미음, 찹쌀·소고기·해삼·홍합 등을 같이 넣어 고은 삼합미음 등이 있었다. 응이는 죽보다 더 묽은 상태로 마실 수 있는 정도인데, 율무·갈분·녹말·오미자 응이 등이 있었다. 죽상에는 죽이나 미음·응이 등을 주식으로 놓고, 반찬은 맛과 양념이 자극적이지 않은 것들을 올렸다. 소금이나 새우젓으로 간을 한 맑은 조치, 어포·육포·암치보푸라기·자반 등의 마른 찬에 국물김치, 조미를 위해 소금·꿀·청장 등을 종지에 담아 올렸다.

『동문선(東文選)』에서 서거정(徐居正)은 율무를 넣어 끓이는 흰죽이 향기롭다고 하였으며,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는 송엽죽·복령죽·수수죽·부죽(缹粥:채소죽)에 대한 시를 볼 수 있다. 『담헌서(湛軒書)』 가례문의(家禮問疑) 가묘다례식(家廟茶禮式)에는 동지(冬至)에 팥죽[豆粥]을 올린다고 하였다. 『매천집(梅泉集)』에서 불죽(佛粥)을 동지 후에 쑨다고 하였는데, 불죽은 절에서 12월 8일에 석가모니의 성불(成佛)을 기념하기 위해 공양하는 죽으로 석팔죽(腊八粥)이라고도 한다. 그 밖에도 허균(許筠)은 방풍죽(防風粥)을 강릉 외가에서 먹었는데, 달콤한 향기가 3일 동안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고, 『임원경제지』에 기록된 매죽(梅粥)은 매화의 꽃부리가 지면 깨끗하게 씻어 눈 녹인 물로 삶아 죽을 쑤는데 그 향이 매우 좋다고 하였다.

『역잡록(歷雜錄)』에 기록된 죽 쑤는 법으로 양죽은 “깃머리를 농란하게 삶아 손으로 실같이 가늘게 찢는다. 그 물에 쌀을 함께 넣고 죽을 쑤어 간을 맞추어 먹는다.” 또 닭죽은 “살진 암탉을 농란하게 삶아 살을 다 찢는다. 국물은 체에 밭아 뜨는 기름을 버린다. 쌀을 넣어 간을 맞추어 끓이다가, 달걀을 두어 개 풀어 한소끔 끓여 낸다.” 붕어죽은 “큰 붕어의 내장을 빼내고 비늘째 농란하게 달인다. 익힌 붕어를 어레미에 걸러 껍질과 뼈는 발라낸다. 붕어 살과 쌀을 넣어 죽을 쑤되 식초와 생강 등을 넣어 먹는다.” 굴죽은 “굴 껍데기를 죄다 가려내어 씻는다. 기름에 두부를 지져 연포국같이 하고 쌀과 지진 두부와 굴을 죄다 넣어 죽을 쑬 때 달걀 두어 개를 타 한소끔 끓여 간을 맞추고 양념을 더하여 먹는다.” 박죽은 “연한 박을 껍질과 속을 깎고 발라 흰 살을 얇게 저민다. 쌀을 넣고 혹 제육이나 닭이나 굴이나 넣고 쑤면 좋다.”

죽은 주식의 대용, 별미식, 간편식, 약용이나 보양식, 환자식, 진휼과 구황식 등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궁중에서는 이른 아침에 먹는 초조반(初朝飯)으로 죽을 올렸으며, 일반 반가에서도 자릿조반이라 하여 아침에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대로 바로 죽이나 미음 등을 먹었다.

나라에 기근(飢饉)이 들면 경창(京倉)의 쌀을 진휼하였는데, 노약(老弱)과 질병으로 스스로 관가에 와서 진제를 받을 수 없는 자에게는 수령들이 죽미(粥米)와 염장(鹽醬)을 직접 나누어 주었다(『태종실록』 16년 2월 26일)(『세조실록』 3년 7월 14일). 선조대에는 청(廳)을 설치하여 기민(飢民)을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병란을 겪어서 도성 안에 굶주려 쓰러진 시체가 즐비하자 5장(場)을 설치하여 미죽(糜粥)을 끓여 나누어 구휼하도록 명하고, 왕이 친히 나아가 지급하기도 하였다(『선조수정실록』 26년 10월 1일).

유민들과 거지들의 구제에도 죽이 요긴하였다. 숙종대에는 유랑하는 거지 무리에게 쌀죽[米粥]을 쑤어 나누어 먹이도록 하였다(『숙종실록』 23년 2월 30일). 영조대에는 경기·황해·강원도의 유민(流民)으로 도성에 들어온 자가 1,4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진휼청(賑恤廳)에서 죽을 끓여 구제하였다(『영조실록』 17년 3월 26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도 상중에 슬픔에 지쳐서 밥을 먹을 수 없을 때는 죽을 먹으라고 하였다. 세종대에는 왕실의 친상(親喪)에 왕세자(王世子)와 대군(大君) 이하 여러 아들은 3일 안에는 죽을 조금 먹고, 3일 뒤에는 밥을 먹고, 달이 넘으면 조금 술을 마시고, 졸곡(卒哭) 뒤에는 고기를 먹으라고 하였다(『세종실록』 29년 12월 19일).

죽은 질병에 의한 치료나 보양식으로도 애용되었다. 중종은 질병이 번지니 전죽(饘粥)으로 구원하게 하였다(『중종실록』 38년 5월 17일). 전죽은 된 죽과 묽은 죽이라는 뜻으로 죽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인조는 병중에 있던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에게 입궐하게 하여 국정에 대해 묻고, 타락죽[酪粥]을 내어다 먹게 하였다(『인조실록』 3년 9월 21일).

궁중의 보양죽으로는 타락죽이 많이 이용되었는데 폐해도 많았다. 중종은 외방 수령(守令)이 사명(使命)에게 음식을 접대할 때에 타락죽을 사용하므로 소를 가진 백성들은 오랫동안 관청 문전에 서 있게 되고, 소가 여위어지면 향리(鄕吏)가 헐값으로 억지로 팔아 백성이 폐해를 입으므로 금하게 하였다(『중종실록』 6년 1월 7일).

영조는 자전(慈殿)과 대전(大殿)·세자궁(世子宮) 등에 바치는 다섯 주발의 타락죽을 위하여 열여덟 마리의 송아지에게 젖을 굶게 하는 것은 어진 정치가 아니다. 원손궁에는 책봉(冊封) 뒤에 거행하고 내의원(內醫院)으로 하여금 소의 수를 줄이게 하였다(『영조실록』 29년 7월 9일). 또한 봄갈이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타락죽을 올리지 말고, 소를 본 고을로 내려 보내어 봄갈이에 사용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44년 1월 12일).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면, 철종대에도 “소가 젖을 먹이지 않으면 가축이 번성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무익한 일로써 금수에게까지 해를 미치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약원(藥院), 내의원이 왕에게 올리는 타락죽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왕이 외부에 행차를 하였을 때 간편식으로도 죽을 먹었다. 성종이 광릉(光陵)에 거둥하여 친히 제사 지내고, 봉선전(奉先殿)에 나아가 세조의 수용(晬容)을 배알(拜謁)할 때에 봉선사(奉先寺) 주지 조징(祖澄)이 병과(餠果)와 미죽(糜粥)을 바쳤다(『성종실록』 20년 9월 19일).

숙종은 신하들에게 특별히 죽을 내리기도 하였다. 사은(謝恩)하는 대사헌(大司憲)허목(許穆)을 불러 양식과 반찬·시탄(柴炭)·초모(貂帽)·타락죽을 하사하였고[『숙종실록』 즉위 11월 29일 1번째기사], 야대(夜對)에 특별히 참여한 윤휴(尹鑴)에게 배와 감 각 한 쟁반과 율무죽[薏苡粥] 한 그릇씩을 내려 주었다(『숙종실록』 1년 9월 9일).

변천

과거에 진휼과 구황식으로 쓰였던 죽은 요즘 별미식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 바쁜 현대인들을 위한 간편한 편의식으로 개발되기도 한다. 한편 우유는 흔해졌지만 궁에서 보양식으로 애용했던 타락죽은 보기 어려워졌다.

참고문헌

  • 『계곡집(谿谷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담헌서(湛軒書)』
  • 『동문선(東文選)』
  • 『매천집(梅泉集)』
  • 『역잡록(歷雜錄)』
  •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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