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품(田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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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질의 비옥도, 물 대기의 용이함 등 여러 경작 요건을 고려하여 책정한 토지의 등급.

개설

고려와 조선왕조는 결부제(結負制)를 기준으로 농업 생산물을 수취하였다. 결부제란 토지를 절대 면적으로 계량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량을 기준으로 토지를 구획하는 방법이었다. 즉, 척박한 땅은 비옥한 땅보다 더 넓은 면적을 1결(結)로 정하여 절대 면적이 달라도 같은 1결로 계량된 토지에서는 동일한 곡식이 생산되고, 이에 근거하여 1결당 동일한 세액을 부과하였다.

결부제에서는 토질 등의 경작 여건을 기준으로 토지의 등급을 매겨, 각 등급마다 다른 자[尺]로 토지를 측량하였다. 이러한 토지의 등급을 전품이라고 불렀다. 조선 초기에는 상·중·하의 3등급으로 전품을 구분하였다가 세종 26년 공법(貢法) 도입이 결정된 이후에는 6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이후 전품6등법(田品六等法)은 조선왕조 전 기간에 걸쳐 전품을 정하는 기준으로 활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결부제를 통한 수취를 위해서는 우선 전품, 즉 토지의 생산력을 등급화하고 그에 따른 기준으로 토지 면적을 측정하여 결부로 표현하여 양안(量案)에 등재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 토지의 생산력은 토지마다 천차만별이므로, 이러한 차이를 모두 반영하여 등급을 매길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초에는 토지를 상·중·하의 3등급으로 전품을 매겼다. 이에 의하면 상등급의 토지는 20지척(指斥)을 기준으로 양전하였고, 중등급은 25지척, 하등급은 30지척을 기준으로 양전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기준으로 토지 1결을 측정할 때 한 변 길이의 비는 4:5:6이 되고, 면적의 비는 16:25:36이 되었다. 실제 세종대 공법 도입 검토 과정에서 국초의 3등급 토지의 실제 면적을 언급하는 자료에 나타난 수치는 상등전 1결이 25.43묘(畝), 중등전이 39.9묘, 하등전이 57.62묘로 앞의 비율과 거의 흡사하였다. 이러한 토지 1결은 모두 동일한 양의 곡식을 생산할 것으로 상정되었는데, 국초의 1결 생산량은 300두(斗), 그에 대한 수취액은 그 1/10인 30두로 책정되었다.

이러한 전품 상정 방식은 세종 집권 기간에 공법의 도입이 논의되면서 크게 변하였다. 기존의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세액을 차감해 주는 정률세(定率稅)였다. 세종은 국가 수입을 예측하기 어려운 정률세 대신 풍흉에 관계없이 일정량의 수입을 예상할 수 있는 정액세로 바꾸고자 하였다. 이러한 구상을 현실화하고자 한 것이 공법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풍흉에 따라 작황의 편차가 커서 제도의 안정적인 운영이 어렵다는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에 따라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공법은 종래의 정률세 방식을 고수하되, 세를 부과하는 기준인 토지와 작황에 대한 판단을 더욱 세분화·정교화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품 등급에 대한 내용도 큰 변화를 겪었다.

우선 국초의 3등급 전품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당시 조선의 토지는 대부분이 3등급인 하등전에 속해 있어, 토지의 전품 판정이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하등전을 다시 3등급의 토지로 세분했다. 그 결과 종래의 상등·중등전에 다시 3분등된 하등전까지 총 5등급의 전품이 만들어졌다. 또한 종래 상등전과 중등전의 경우도 수원(水源)의 유무, 토질의 특징 등을 고려하여 토지 등급 선정 기준을 재조정하였다. 이후 다시 하등전보다 열등한 토지를 6등전으로 편입, 총 6등급의 전품을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전분6등법, 즉 1등전부터 6등전까지로 전품을 판정하는 것이 세종 26년 공법 제정과 더불어 결정되었다(『세종실록』 26년 6월 6일).

세종대 전품6등의 도입은 단순히 전품을 세분화하는 것 이외에도 많은 내용을 포함하였다. 우선 6등급의 토지 면적이 재조정되었다. 즉, 1등전의 경우 절대 면적이 38묘, 2등전은 44.7묘, 3등전은 54.2묘, 4등전은 69묘, 5등전은 95묘, 6등전은 152묘의 토지를 1결로 책정하였다. 종래 상·중·하로 토지 등급을 나누었을 때 상등전과 하등전의 절대 면적의 비가 약 1:2.5였던 것에 비하면 6등급 전품 판정에 의한 면적 산정은 1등전과 6등전의 면적비가 약 1:4에 달해서 그 편차가 훨씬 커졌다. 면적 편차의 조정은 생산 여건에 따른 실제 생산량과 전품의 등급 판정이 일치하도록 조금 더 정교화한 결과였다.

한편으로는 1결당 생산량이 300두에서 400두로 재조정되었고, 1결당 수취액도 1/10이 아니라 1/20로 바뀌었다(『세종실록』 26년 8월 24일). 전품을 6등급으로 판정하면서 아울러 함께 도입된 연분9등, 즉 풍흉의 정도를 상상년(上上年)부터 하하년(下下年)까지 9등급으로 나누어 세를 거두는 법이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1결 토지에 대한 전세는 최대 20두에서 최소 4두에 이르는 범위를 갖게 되었다.

토지의 생산력에 대한 평가도 변하였는데, 이전 시기에 비하여 오히려 완화된 기준을 제시하였다. 앞서 국초 3등급 토지에서 상등급의 토지 1결의 절대 면적은 25.43묘였다. 1결의 생산량은 300두이므로 국초 상등급 토지 1묘에서는 대략 11.7두의 생산을 예측한 것이었다. 중등전의 경우는 7.5두, 하등전의 경우는 5.2두 정도의 생산량을 상정하였다.

반면 공법의 경우 1결당 생산량이 400두로 책정되었으나 그 절대 면적이 크게 증가하면서 절대 면적 대비 생산량에 대한 평가가 다소 하향 조정되었다. 즉, 1등전의 경우 1묘당 생산량이 10.5두, 2등전은 8.9두, 3등전은 7.3두, 4등전은 5.7두, 5등전은 4.2두, 6등전은 2.6두 정도로 책정되었다. 국초의 상등전·중등전·하등전의 토지를 6등급 전품의 1·2등전, 3·4등전, 5·6등전과 비교해 보면 다소 평가가 완화된 생산량을 확인할 수 있다.

위와 같은 6등급의 전품 판정 기준은 1444년(세종 26)에 도입이 결정되었으나, 실제 시행을 위해서는 전국적인 양전 사업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세종대에는 기존의 3등급 전품을 6등급 전품으로 환산하여 전세를 수취하였다. 이후 세조대부터 성종대 이르기까지 도별로 새로운 양전이 실시되었고 이에 따라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전국의 토지를 전품 6등급의 토지로 양전할 수 있었다.

변천

1444년에 결정된 6등급의 전품 판정은 이후 조선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다만 전품을 판정한 이후 이를 양전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발생하였는데, 양전 과정에서 6개의 기준 자[尺]를 모두 사용하지 않고, 1등전 기준 자로 모든 토지를 측량한 후 해당 토지 등급의 면적으로 환산하여 계산하는 양전법이 사용되었다. 『속대전』에는 이렇게 1등전 자를 이용하여 양전한 후 다시 각 등급으로 환산하는 작업을 ‘해작(解作)’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양전법은 효종대부터 사용된 듯한데, 효종대 양전 원칙을 기재한 『전제상정소준수조획(田制詳定所遵守條劃)』에는 2등전부터 6등전까지 토지로 환산하는 방법이 함께 기재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 이철성, 『17·18세기 전정 운영론과 전세 제도 연구』, 선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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