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정사(億正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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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 있었던 절.

개설

억정사(億正寺)는 고려초기에 창건되었으나 관련 기록은 없다. 억정사에 있었다는 철조여래좌상이 현재 충주 백운암(白雲庵)에 전한다. 고려후기의 고승 대지(大智) 국사(國師)찬영(粲英)이 수행하며 교화하다가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조선 태조가 시호를 내리고 비를 세웠다. 절터에는 이 비만 남아 있다. 세종대에 종파를 통폐합하고 공인 사찰을 축소하는 과정에서 폐사된 듯하다.

변천

(1) 고려시대

고려초기에 창건되었으나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억정사에는 10세기 전반에조성된 철조여래좌상(보물 제1527호)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충주 백운암에 있다. 조형미와 예술성을 지닌 우수한 불상으로 절의 사격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후기에는 대지 국사찬영이 주석하다 입적하였다. 찬영은 14세에 삼각산중흥사(重興寺)로 출가해 보우(普愚)의 문하에서 5년 동안 수학하였다. 1350년(고려 충정왕 2) 승과에 급제하였고, 3년 후 공부선(工夫選)에서 다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양주소설산(小雪山), 삼각산 등에서 수행하다 1359년(고려 공민왕 8) 양가도승록(兩街都僧錄)이 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사양하고 석남사(石南寺)·월남사(月南寺)·신광사(神光寺)·운문사(雲門寺) 등에서 수행과 교화에 힘썼다. 1383년 우왕이 왕사(王師)로 봉하고 억정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창왕과 공양왕이 왕사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억정사에 은둔하였고, 이듬해 입적하였다. 절의 동쪽 언덕에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다. 왕은 지감(智鑑) 국사(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혜월원명(慧月圓明)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1393년(태조 2) 태조는 다시 대지(大智) 국사(國師)라는 시호와 지감원명(智鑑圓明)이라는 탑호를 내리고, 억정사에 탑비(보물 제16호)를 세웠다. 고려말 4대(代) 국왕의 존경을 받았고 사후에도 신왕조 조선에서 비를 세울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찬영 이후 절에는 선진(禪軫) 대선사(大禪師)가 머물렀다. 선진은 고려말의 문신 이색(李穡)이 쓴 시 「송억정선진대선사(送億政禪軫大禪師)」와 「금주음(衿州吟)」에 등장한다. 판조계사(判曹溪事)인 죽암(竹菴)선진(禪軫)이 궁궐 내에 설치된 불당인 내원당(內院堂)에서 물러 나와 억정사로 돌아가는 길에 이색을 찾아와 만났고, 이때의 감상을 적었다. 선진은 찬영의 제자로 스승의 비문을 지은 인물인데 비에는 ‘선진(旋軫)’이라고 하였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 들어 1398년(태조 7) 절은 중흥사와 함께 전조(田租)의 납세를 면제받았다(『태조실록』 7년 1월 24일). 1426년(세종 8)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사헌부의 장계(狀啓)에 절이 등장한다. 즉 절의 전 주지 성조(性照)·해순(海淳) 등이 이미 혁파한 절에서 가족을 이루고 절의 토지를 경작한다는 내용이다(『세종실록』 8년 10월 27일). 이보다 2년 앞선 1424년 조선은 기존의 7개 종파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하면서 국가의 공인 사찰 수를 242개에서 36개로 축소하였다. 국가에서 공인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찰은 존재하고 있었다. 억정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1424년 통폐합 이전까지는 242개의 공인 사찰에 포함되었다가 36사로 축소되면서 공인 사찰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이미 혁파한 절에서 전 주지 등이 절의 토지를 경작하며 살고 있다는 지적이다. 세종은 토지를 점유한 승려들을 장형(杖刑)에 처하고 환속시키도록 명하였다. 이로써 절은 폐사된 듯하다.

참고문헌

  • 『목은시고(牧隱詩藁)』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