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랑기(佛狼機)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불랑기 |
한글표제 | 불랑기 |
한자표제 | 佛狼機 |
관련어 | 지화식(持火式) 점화법(點火法), 호준포(虎蹲砲), 후장식(後裝式) 화포(火砲) |
분야 | 정치/군사·국방/병기 |
유형 | 물품·도구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박재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불랑기(佛狼機)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2년 5월 29일 |
임진왜란 때 명에서 도입한 것으로 불씨를 손으로 점화하여 발사시키는 지화식(持火式) 점화법을 사용하는 후장식(後裝式) 화포.
내용
불랑기라는 말은 중국과 교역하던 아라비아인들이 서양인을 파랑기(Farangi)라고 부른 데서 생겼는데, 이 말은 중세의 Frank에서 유래했다. 불랑기의 가장 큰 특징은 포가 모포(母砲)로 불리는 포신과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자포(子砲)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포 하나에는 여러 개의 자포가 있으며, 이 자포에는 항상 화약과 탄환이 장전되어 있어서 오늘날의 탄약통(cartridge)에 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포 사격을 할 경우에 모포의 뒷부분에 있는 자포실(子砲室)에 탄약이 장전된 자포를 끼워서 발사하는 후장식 화포이다. 1호부터 5호까지 다섯 종류가 있었으며, 자포는 모포 1문에 5문에서 9문이 한 세트로 사용되었다.
이 불랑기는 특히 화포의 운용 조작이 매우 간단하였는데, 먼저 모포의 포신 속을 청소한 다음 탄환이 장전된 자포를 자포실에 끼워 넣으면 바로 발사가 가능했다. 또 1차 사격 후에 바로 자포를 재장전하여 사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발사 간격이 매우 짧아 당시의 다른 대포와 비교할 때 사격 속도가 무척 빨랐다.
이런 불랑기는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전래되었지만 일본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 구저성(臼杵城)의 공방전에서 사용한 적이 있으나,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할 때까지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고, 활용되지도 않았다.
우리나라에 불랑기가 들어오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로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 전투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1592년 12월 하순, 명나라 이여송은 43,00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후 이들 명군은 조선군과 연합하여 1593년 1월 6일, 평양성 탈환을 위한 공격을 시작했다. 명군은 호준포·위원포·불랑기 등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강한 화포들을 이용하여 성벽과 성문에 집중 공격을 펼쳤다. 그 결과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외곽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 평양성의 외성을 점령하였으며, 계속 중성으로 돌입하여 소서행장(小西行長) 군을 만수대와 을밀대 쪽으로 압박하여 끝내 일본군을 물리치고, 평양성을 탈환하였던 것이다.
이후 이덕형(李德馨)이 선조에게 전투 상황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명나라가 사용한 불랑기·호준포 등의 화포의 성능이 뛰어남을 언급했다. 이후 불랑기가 기존 화포에 비해 규모가 작아 전투에서의 효용성이 높고, 성능도 우수하였기 때문에 적극 도입하여 거북선 등에 장착해 전란을 극복하기 위한 신무기로 활용하였다.
이후 불랑기는 조선후기까지 많이 제조되어 활용되었다. 조선의 불랑기는 중국에서 예부터 사용해왔던 포와 비교하여 구경과 포신의 길이를 비교한 수치인 구경장(口徑長)이 크고 또한 포신의 굵기가 일정하였다. 때문에 화약의 폭발가스가 효과적으로 작용하여 발사된 탄환은 강력한 위력을 가질 수 있었다. 불랑기는 고정식 포가와 이동용 포가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데, 신헌이 저술한 『훈국신조기계도설(訓局新造器械圖說)』에는 중국의 『해국도지(海國圖志)』의 마반포차를 응용한 불랑기동차가 나와 있다. 이 불랑기동차는 당시 조선의 주력 화포였던 불랑기의 운반이나 발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포차로서 활차를 이용하여 포를 좌우로 쉽게 움직일 수 있게 함으로써 이전에 비해 불랑기의 활용도를 더욱 높였다. 또한 포신에 가늠자[照門]과 가늠쇠[照星]를 갖춰 조준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목표에 대한 명중률을 높였다.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辛未洋擾)에 참전했던 미군의 수기(手記)나 미군이 찍어 간 사진을 보면 조선군의 화포가 불랑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만기요람(萬機要覽)』에 기록된 각 진영의 화기 보유 현황에서도 불랑기가 들어 있는 점으로 보아 불랑기는 구한말까지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례
兵曹啓曰 常時都監砲手 只習鳥銃 不習他放 故只書鳥銃啓之 今承下敎 諸砲中如虎蹲佛狼機等砲 多容丸子 似妨於中數之試 惟三眼銃小勝字銃 可合試才 然欲令解其放法 此四件砲 竝爲書啓 落點試取無妨 鳥銃六柄試放 邊三中及貫一中邊一中以上 殺手三技中 二技上下以上入格者試取 似爲便當(『선조실록』 32년 5월 29일)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기비결(神器祕訣)』
-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
- 『융원필비(戎垣必備)』
- 국사편찬위원회 편,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경인문화사, 2008.
- 박재광, 『화염조선-전통 비밀병기의 과학적 재발견』, 글항아리, 2009.
- 이강칠, 『한국의 화포』, 동재, 2004.
- 허선도, 『조선시대 화약병기사 연구』, 일조각, 1994.
- 박재광, 「임진왜란기 조·일 양국의 무기체계에 대한 일고찰」, 『한일관계사연구 6』, 1996.
- 박재광, 「임진왜란기 朝·明·日 삼국의 무기체계와 교류」, 『군사 51』, 군사편찬연구소, 200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