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제(李先齊)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1월 10일 (수) 00:27 판 (XML 가져오기)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390년(공양왕 2)~1453년(세종 35) = 64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부교리(副校理)와 호조 참판(參判),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 등을 지냈다. 자는 가보(家父)이고, 호는 필문(畢文)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일영(李日英)이고, 할아버지는 고려 때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이홍길(李弘吉)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기(李奇)이다.

세종~단종 시대 활동

1419년(세종 1) 증광시(增廣試)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했다.[『방목(榜目)』] 1423년(세종 5)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할 때 사관(史官)으로 참여했는데, 이전에 편찬된 『고려사』는 고려 후기 이색(李穡)과 이인복(李仁復)이 지은 역사책 『금경록(金鏡錄)』을 바탕으로 하여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고려 때의 관호가 제(制) 또는 칙(勅)으로 지금의 것과 다르지만 모두 당시의 제도이므로 원래 명칭대로 서술하기를 청했으며, 세종은 이 말에 따르도록 했다.(『세종실록』 5년 12월 29일) 1428년(세종 10) 중추부(中樞府) 판사(判事)변계량(卞季良)이 문과의 초장(初場)에서 강경(講經)이 아닌 제술(製述) 위주로 시험을 치게 할 것을 상소했다. 그러자 이선제는 제술 위주로 시험을 치르면 과거를 치는 사람이 옛 사람의 글을 따라하는 조잡한 기술만 익히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세종실록』 10년 4월 23일) 1431년(세종 13)에는 집현전 부교리(副校理) 겸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태종실록』 편수관 명단]

1439년(세종 21) 세종은 이선제에게 『고려사』의 내용 중 왕씨(王氏)를 용의 자손이라고 하는 말이 매우 괴상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충선왕(忠宣王)이 원(元)나라에 갔을 때 원나라 학사에게 그 이유를 설명한 것이 있다며 이를 인용하여 보충하게 했다.(『세종실록』 21년 1월 12일) 1442년(세종 24) 이선제는 세종의 명에 따라 흥천(興天) 사리각(舍利閣) 경찬소문(慶讚疏文)을 지어 올렸다.(『세종실록』 24년 3월 12일),(『세종실록』 24년 3월 17일)

1443년(세종 25) 형조 참의(參議)에 제수되었으며, 1444년(세종 26)에는 중추원(中樞院) 첨지사(僉知事)와 병조 지사(知事)를 겸직했다가, 병조 참의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올랐다(『세종실록』 25년 9월 12일),(『세종실록』 26년 1월 20일),(『세종실록』 26년 2월 7일),(『세종실록』 26년 7월 1일),(『세종실록』 26년 10월 10일) 이때 이선제가 천신(薦新)할 때 진상하는 생어육(生魚肉)이 여름에는 상하기 쉬우므로 강원도 곳곳에 얼음을 저장해 쓸 수 있게 하도록 청하자, 예조와 의정부에서 의논한 후 이선제의 말에 따랐다.(『세종실록』 27년 12월 10일) 이어 1446년(세종 28)에는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다.(『세종실록』 28년 6월 27일) 이듬해인 1447년(세종 29) 이선제는 조선이 전조(田租)로써 곳간을 채우고 있는데 그 해의 풍년과 흉년에 따라 차등이 크다는 것을 지적하며, 소금은 풍년과 흉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조선의 삼면이 바다라서 항상 소금이 풍성하니 소금으로 세금을 정하여 국고를 채울 것을 건의했다.(『세종실록』 29년 9월 23일) 그해 12월 호초 참판(參判)에 제수되었으며, 1448년(세종 30)에는 명(明)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가서 정조(正朝)를 하례했다.(『세종실록』 29년 12월 3일),(『세종실록』 30년 10월 8일) 이듬해인 1449년(세종 31) 세종은 『고려사』를 다시 살펴보고 자세히 보충하라고 명한 뒤, 의정부 우찬성(右贊成)김종서(金宗瑞)와 이조 판서(判書)정인지(鄭麟趾),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정창손(鄭昌孫) 그리고 이선제에게 이를 함께 살펴보도록 명했다.(『세종실록』 31년 1월 28일)

1450년(문종 즉위년) 예문관 제학에 올랐으며, 얼마 후 세자가 처음으로 서연을 열자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서 『소학(小學)』을 강론했다.(『문종실록』 즉위년 7월 6일),[『문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이후 이선제는 서북 지방의 익군(翼軍)제도를 살펴보았는데, 군사의 수가 많지 않고 민가도 비어있을 뿐 아니라 읍성과 산성이 무너진 상태였다. 그런데 의주(義州)에서 경기(京畿)에 걸쳐 예전에 방어하던 성의 터가 남아있었으므로 이선제는 이것을 이용해 성을 다시 수축하고 수성군졸(守城軍卒)을 뽑아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주장해 조정의 동의를 끌어냈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10일) 1452년(문종 2) 경창부윤(慶昌府尹)에 제수되었다가 곧 반송사(伴送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문종실록』 2년 2월 20일),(『단종실록』 즉위년 8월 27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535-1번지에 있으며,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이선제의 묘는 부조묘(不祧廟)로 되어있는데, 부조묘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을 기려 사당을 짓고 그 안에 신주를 두는 사당을 일컫는다. 원래 신주는 4대가 지나면 사당에서 꺼내 땅에 묻는 것이 원칙이나, 부조묘의 신주는 땅에 묻지 않고 영원히 제사 지내는 것이 가능했다. 이선제의 경우 부조묘의 뒤쪽에 실제 묘와 묘비가 있다.

부인 보성 선씨(寶城宣氏)는 선윤지(宣允祉)의 딸이며,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이시원(李始元)이고, 차남은 이조원(李調元)이며, 삼남은 이한원(李翰元)이다. 사남은 이찬원(李贊元)이고, 오남은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이형원(李亨元)이다.

오남 이형원의 4대손인 이발(李潑)은 1584년(선조 17)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는데, 1589년(선조 22) 동생 이길(李洁)과 함께 <정여립(鄭汝立)의 난>에 연루되어 죽었다. 이때 이선제 또한 그 선조로서 삭탈되었다.(『선조실록』 22년 12월 1일),(『선조실록』 24년 4월 1일)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선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보성선씨족보(寶城宣氏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