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통사(朴通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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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부터 전해진 중국어 학습서.

개설

『박통사(朴通事)』는 『노걸대(老乞大)』와 같이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한어(중국어) 학습서로, 『노걸대』보다는 수준 높은 고급 회화 교재였다. 본문의 내용은 주로 당시의 중국 및 중국인의 생활에 관한 회화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편자와 간행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체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중국어 회화 교과서로 쓰였다.

편찬/발간 경위

『박통사』의 정확한 간행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려 말부터 교제로 사용되어 조선 초기에는 이미 중국어 학습서로써 자리매김 하고 있었다.(『세종실록』 5년 6월 23일),(『세종실록』 8년 8월 16일) 한편 16세기 초에 최세진(崔世珍)이 『박통사』를 번역하여 『번역박통사』를 펴냈는데, 상ㆍ중ㆍ하로 이루어져 있었던 이 책은 현재 상권만이 전하고 있다. 간행년도가 분명하지 않으나, 『사성통해(四聲通解)』에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ㆍ「박통사범례(朴通事凡例)」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1517년(중종 12) 이전의 일로 추정된다.

언해본도 이미 존재했던 것 같지만 이 초간본은 병란으로 소실되고, 후에 『노걸대』와 『박통사』의 요점을 추려서 주석을 붙여 해석한 『노박집람(老朴輯覽)』을 참고해, 1677년(숙종 3년) 권대운(權大運)ㆍ박세화(朴世華) 등이 다시 고증하여, 『박통사언해』를 간행했다. 후에 다시 내용을 수정한 『박통사신석(朴通事新釋)』을 만들고 언해하였는데, 『통문관지(通文館志)』 권8에는 「신석박통사」 및 「신석박통사언해」라 기록되어 있다. 본문 글자마다 한글로 붙인 중국의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의 두 종류 발음표기와 구절마다 언해문을 붙인 체재로 되어 있다. 다른 언해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직역체이며, 원문과 언해문 사이에 권표(圈標), 구 사이에 'ㄴ'표가 표시되어 있다.

서지 사항

총 3권으로 되어 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59년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연구실에서 영인본을 간행하였다.

구성/내용

역관은 외국어 통역을 전담하는 관리로서, 요즘으로 치면 외교관이나 통역사이다. 조선시대에는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사역원(司譯院)을 두고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역관을 양성하였다. 사역원은 조선시대 내내 존속하면서 ‘사대교린’이라는 조선의 기본 외교 방침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했다. 사역원에서는 회화, 강서(講書), 사자(寫字), 번역 등의 분야로 나누어, 체계적인 외국어 학습을 했으며, 여기서 양성된 역관들은 외교의 일선에서, 그리고 국제무역에도 깊숙이 참여하며 시대의 변화를 이끄는 한 주역이 되었다.

사역원에서는 당시의 4대 외국어인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한학청, 몽학청, 청학청, 왜학청이라 불린 관청에서 각각 전담했다. 또 우어청(偶語廳)이라 하여, 하루 종일 외국어로만 대화하도록 한 회화 교실도 있었다. 당시의 제1외국어는 당연히 중국어였고, 사역원에서도 한학청의 규모가 가장 컸다.

『박통사』에서 ‘박’은 성(性)으로 ‘박씨’를 가리키는 것이고, ‘통사’는 본래 명(明)나라 때 예부(禮部)에 속해 있는 관직명으로 외국어 역관의 일을 맡았던 관직이다. ‘노걸대’라는 명칭이 몽고어의 영향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박통사’는 한국식의 책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일설에는 ‘중국통’을 의미하는 ‘노걸대’는 중국인 역관에 대한 경칭이며, ‘박통사’는 고려인 통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박통사』는 『노걸대』에 비하여 그 내용이 일반 풍속, 문물 등 생활에 관계된 것이 많다. 모두 106절로 나뉘었고 일관된 이야기가 없이 1회 완결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노걸대』와 마찬가지로 중국어 발음과 우리말을 병기하였는데, 『노걸대』가 상인의 무역 활동을 주로 한 ‘상업 회화’에 가까운 것에 비해서, 『박통사』에서는 일상생활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노걸대』와 함께 고려 말에 편집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어와 한국어의 생생한 모습뿐 아니라 당대의 풍속 및 문물 제도까지도 접할 수 있는 자료다.

성종(成宗) 때 산개(刪改)된 『박통사』는 고려 때 편찬된 원간본 『박통사』가 당시의 중국어와 괴리가 있자, 한어문을 당시의 현실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원간본이 전하지 않고 있어, 산개할 때 수정된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한어문(漢語文)에 나타나는 관청명·관직명·행정구역명·성문명·궁궐 내 건물명 등 시의성을 가지는 단어를 대상으로, 이들 중 원대(元代)의 명칭이 명대(明代)의 것으로 변경된 것을 추출할 수 있다. 명대의 명칭을 반영한 것은 모두 산개 시에 수정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통사』는 국어사뿐만 풍속사, 문화사, 경제사 등 여러 영역의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데, 현존 최고본(最古本)인 산개본에는 신구(新舊)의 내용이 공존한다.

『박통사』의 자료는 언어사와 문화사의 가치가 높아서, 일찍이 많은 언어사와 문화사 분야의 연구 결과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어 교재라는 본래의 성격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희소한 상황이다.

이 책은 중국에 가서 상업거래를 하는 고려인(혹은 조선인)을 위한 일종의 특수목적의 교재이다. 이 교재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고려, 조선의 선인들이 중국어 교재집필을 함에 있어서, 언어와 문화의 관계가 긴밀하고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의 구성에서 당시 중국사회와 문화의 이모저모를 고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거래 목적의 문화 간 의사소통의 기능을 부각시키어, 기능과 문화를 세밀하게 결합시키었다. 또한 집필 전과정을 통하여, 요소요소 구석구석 학습자를 배려하여 학습자 중심의 원칙을 구현하였다. 또한 실용성, 맞춤성, 지식성, 흥미성이 적재적소에서 빠짐없이 잘 드러난다.

또한 『박통사』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가장 오래된 서유기인 『서유기평화(西流記平話)』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극중 드문드문 등장하는 대화 내용을 통해, ‘황풍괴’나 ‘홍해아’, ‘화염산’, ‘여인국’ 등 『서유기(西遊記)』의 주요 사건들이 당시의 고려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일본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또한 『서유기』의 가장 유명한 등장인물인 ‘저팔계(猪八戒)’를 ‘주팔계(朱八戒)’로 표기한 점도 눈에 띄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저팔계’라는 이름은 원래 명의 태조홍무제의 성이 주(朱)씨인 관계로 명대에 음이 비슷한 저(猪)로 고쳐 쓴 것으로 여겨진다. 『노걸대』와 마찬가지로 중세 한국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참고문헌

  • 김양진(金亮鎭)ㆍ여채려(余彩麗), 「『박통사』 내 난해 한어의 어휘사적 연구」, 『중국언어연구』52 , 한국중국언어학회, 2014.
  • 김창조, 『박통사 신석언해』, 홍문각, 1985.
  • 석주연, 『노걸대와 박통사의 언어』, 태학사, 1969.
  • 양오진, 『노걸대 박통사 연구 : 한어문에 보이는 어휘와 문법의 특징을 중심으로』, 태학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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