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회무(朴檜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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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5년(선조 8)~1666년(현종 7) = 92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현종(顯宗) 때의 의사(義士). 자는 중식(仲植)이고, 호는 육우당(六友堂) 또는 숭정야로(崇禎野老)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거주지는 영천(營川)이다. 아버지는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박녹(朴漉)이고, 어머니 김해 허씨(金海許氏)는 김사렴(金士廉)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목사(牧使)박승임(朴承任)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진사(進士)박형(朴珩)이다. 아우는 박창무(朴摐茂)이며. 정구(鄭逑)와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기도 하다.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김해(金垓)의 딸이다.

선조~현종 시대 활동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던 그는 1606년(선조 3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윤3월 진사로서 광해군(光海君)에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책 본을 올렸다. 그러자 광해군은 “이는 바로 평소에 보고 싶었지만 얻지 못했던 것이다. 매우 기쁘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숙마(熟馬) 1필을 내려주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2년 윤3월 18일]

1627년(인조 5) 의금부 도사로 재임하던 중,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면서 인조가 강화(江華)로 피난하자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 때 그는 상소를 올려 화의(和義)를 배척하며 자강(自强)을 도모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6년(인조 14)에도 소를 올려 시정(時政)과 서북관방의 허술함을 논하고 선정양병(選丁養兵)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해 겨울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출정했으나 화의가 성립되었으므로 통곡하며 되돌아와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그리고 여생을 소나무 · 전나무 · 매화 · 대나무 · 연 · 국화를 심고 키우면서 보냈는데, 그의 호 육우(六友)도 여기에서 나왔다. 1664년(현종 5) 9월 가자(加資) 되었다.

세상을 떠난 후에 경상도 영천(營川)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성품과 일화

박회무(朴檜茂)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중후한 성품을 지녀 노성인(老成人)의 기품을 지녔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현종실록(顯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갈암집(葛庵集)』
  • 『우복집(愚伏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