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평(洪以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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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3년(세조9)∼1525년(중종20) = 63세]. 조선 중기 중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중성(仲城)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어모상호군(禦侮上護軍)홍귀손(洪貴孫)이고, 어머니 원주원씨(原州元氏)는 원효이(元孝而)의 딸이다. 장양공(莊襄公) 홍사석(洪師錫)의 증손자이고, 좌군(左軍)사용(司勇)홍계연(洪季涓)의 손자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13년(중종8) 51세로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많고 음서(蔭敍)로 참하관(參下官)의 전직(前職)이 있었으므로, 초사(初仕)로서 6품의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삼공(三公)에서 그가 교수(敎授)로서의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고 하여(『중종실록(中宗實錄)』), 다시 6품 이하의 참하관에 임명하였다. 이어 정6품 사헌부 감찰로 승진하였고, 장례원 사평으로 옮겼다. 1515년(중종10) 공조 좌랑에 임명되어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이어 예조 좌랑, 소격서 영, 공조 정랑을 차례로 맡았고 1516년(중종11) 형조 정랑이 되었다. 1517년(중종12) 한산군수(韓山郡守)로 나가 임기를 채우고 돌아와서 1519년(중종14) 성균관 사예와 사성, 예빈시 부정, 상의원 정을 역임하였다. 1525년(중종20) 대구부사(大丘府使)로 나갔다가, 그해 겨울에 병이 나 관아(官衙)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3세였다.

성품과 일화

홍이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집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하였으며, 조정에 나아가서는 남을 헐뜯지 않았고 정직하였으며 정사에 조리가 있었다. 또한 자신의 몸가짐은 충성스러웠고, 사물을 접함에는 정성스러웠으므로, 모두 그를 ‘군자(君子)’라고 일컬었다. 무관(武官)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학문을 좋아하는 천성(天性)이 있어 스스로 유학(儒學)을 택하여 배웠다. 그가 ‘사서오경(四書五經)’에 정통했기 때문에, 당시 경서(經書)에 밝은 사람들이 그를 많이 찾아와서 질정(質正)하였고, 경연(經筵)의 강과(講科)에서 성종의 칭찬을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명성이 높이 알려지자 학문의 벗들이 몰려들었는데, 조원기(趙元紀) · 권달수(權達手) · 정희량(鄭希良) 등이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서로 교제하면서 ‘금란계(金蘭契)’를 맺었으므로, 세상에서 그들을 ‘이십팔수(二十八宿)’라고 일컬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전두령(田頭嶺) 남쪽 언덕에 있는데, 안분당(安分堂)이희보(李希輔)가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는 대사헌이세필(李世弼)의 딸로 자녀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홍덕준(洪德濬)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차남 홍덕연(洪德演)은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 정을 지냈으며, 외동딸은 종실(宗室) 의신군(義新君)이징원(李澄源)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미수기언(眉叟記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