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운(全長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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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10년(순조 10)~1866년(고종 3) = 57세]. 조선 후기 천주교도로, <병인박해(丙寅迫害)> 순교자이자 성인. 세례명은 요한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순조~철종 시대 활동

서울에서 천주교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전장운(全長雲)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이문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죽부대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10여 세부터 황 베드로라는 신자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가 발발하였을 때 체포되어 1개월 정도 옥에 갇혔었는데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여 풀려났다. 전장운은 이 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던 중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권면으로 배교를 뉘우치고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845년(헌종 11)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결혼을 해 3형제를 낳아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다른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고종 시대 활동

교회 일에 열심히 참여하던 전장운은 교회 서적 출판에 관계된 일에 참여하라는 베르뇌(Berneux) 주교의 명에 따라 최형(崔炯)·임치화(任致禾)와 함께 판각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866년(고종 3) 조선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가 발발하여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며 많은 교회 서적들이 적발되자 포졸들은 출판물이 제작되던 임치화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임치화는 박해가 일어나기 2~3주 전 집과 인쇄소를 전장운에게 팔고 도망갔고, 빈집에는 전장운만이 남아 있었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포도청으로 끌려간 전장운은 혹독한 심문을 받은 뒤 다시 의금부로 이송되어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끝내 거부하였다.(『고종실록(高宗實錄)』 3년 1월 5일),(『고종실록』 3년 1월 16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3년 1월 5일],[『승정원일기』고종 3년 1월 16일] 결국 전장운은 1월 23일 최형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 바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사망하였다.(『고종실록』 3년 1월 23일) 당시 그의 나이 57세였다. 전장운의 시신은 법에 따라 3일간 길가에 버려졌다가 그의 부인이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찾아서 노고산(현 서울의 신촌 부근)에 안장하였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치명일기』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좌포도청등록(左捕盜廳謄錄)』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0,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