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XML 가져오기) |
(차이 없음)
|
2017년 12월 10일 (일) 02:36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저 |
한글표제 | 저 |
한자표제 | 菹 |
관련어 | 침저(沈菹), 침채(沈菜)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음식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주영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저(菹)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년 12월 7일 |
채소를 소금에 절인 음식.
개설
채소를 소금에 절인 음식을 가리킨다. 왕실 제향에서는 부추를 소금에 절인 구저(韭菹), 무를 소금에 절인 청저(靑菹), 미나리를 소금에 절인 근저(芹菹) 등이 쓰였다. 북한의 학자들은 제향(祭享)에 오른 이 세 가지의 저(菹)를 나물로 번역하기도 했다. 죄인을 소금에 절인다는 의미로 ‘해저(醢菹)’의 용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채소절임을 뜻한다.
내용 및 특징
중국 한나라 때의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저는 초채(酢菜)이다. 과저(瓜菹)를 부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초채’는 신맛이 강한 채소를 가리킨다. 진나라의 여불위(呂不韋)가 편찬한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는 주나라 문왕(文王)이 저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공자가 듣고서 콧등을 찡그리면서 이를 먹은 지 3년 후에야 그 맛을 즐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대 중국에서는 ‘저’를 신맛이 나는 음식을 가리킬 때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례(周禮)』 「천관(天官)」 ‘해인(醢人)’에서는 제사에 쓰이는 제물(祭物)로 칠저(七菹)가 있다고 했다. 정현(鄭玄)의 주석에 의하면, 칠저는 부추절임[韭菹], 무절임[菁菹], 순채절임[笷菹], 아욱절임[葵菹], 미나리절임[芹菹], 이끼절임[菭菹], 죽순절임[笋菹] 등이다. 또 『주례』에서는 저를 ‘두(豆)’라는 제기(祭器)에 올려서 제상에 차린다고 했다. 이런 규칙이 조선 왕실의 제향에 적용되었고, 칠저 중에서 부추절임·무절임·미나리절임 세 가지가 반드시 제사에 올랐다(『세종실록』 1년 12월 7일).
변천
『시경(詩經)』「소아(小雅)」에는 “밭 속에 작은 원두막이 있고, 밭두둑에 과(瓜)가 열려 있다. 이 외를 깎아 저를 담가 조상께 바치면 자손이 오래 살고 하늘이 내린 복을 받는다.”는 시가 나온다. 지금까지 발견된 저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고려시대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가포육영(家圃六詠)’에서 ‘지염(漬塩)’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청(菁: 순무)’으로 채소절임을 만드는 과정을 시로 적었다. “청을 장(醬)에 담그면[醬尤] 여름 3개월 동안 먹기에 매우 마땅하고, 소금에 절이면[漬塩] 겨울 9개월을 능히 견딜 수 있네. 뿌리는 땅 밑에 휘감겨서 약간 통통한데, 서리가 내릴 때 칼로 자르면 가장 먹기 좋은데 그 모양이 배(梨)와 비슷하다.”
이색(李穡)은 『목은시고(牧隱詩藁)』에서 ‘침채(沈菜)’라는 용어를 채소절임의 뜻으로 사용했다. “개성 사람 유순이 우엉·파·무를 섞어서 만든 침채와 장을 보내 왔다.” 여기서 ‘침채’는 소금절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 서거정(徐居正)은 『사가집(四佳集)』에 실린 「순채포유작(廵菜圃有作)」이란 한시에서 “내 정원 안에 두어 이랑 남짓한 땅이 있어, 해마다 아름다운 채소들을 가득 심으니, 순무[蕪菁]와 무[蘿蔔]와 상추[萵苣]와, 푸른 미나리와 하얀 토란과 붉은 차조기에, 생강·마늘·파·여뀌랑 오미(五味)가 갖추어져서, 잘 삶아서 국 끓이고 절여서[沈] 저를 만드니라.”고 했다. 아마도 순무·무·상추·미나리 등을 절여서 저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 때 어의(御醫)였던 전순의(全循義)는 『산가요록(山家要錄)』에서 침채를 만드는 법을 여러 가지 소개하였다. ‘침백채(沈白菜)’는 “깨끗이 씻은 배추 한 동이에 소금 삼 홉을 고루 뿌려 넣고 하룻밤 지낸다. 다시 씻어서 먼저처럼 소금을 뿌리면서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붓는다. 다른 침채법과 같다.”고 했다. 배추를 소금물에 절이는 방법이다. ‘청침채(菁沈菜)’는 무를 재료로 하지만 들어가는 양념이 없이 오로지 소금물로 맛을 낼 뿐이다. 다만 항아리의 국물에 거품이 생기거나 넘치면 매일 걷어 내고 소금물을 타서 조금씩 부어 주면 좋다고 했다. 생파를 이용한 ‘생총침채(生蔥沈菜)’ 역시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5~6월에 생파를 뿌리와 겉껍질을 없애지 말고 깨끗이 씻어서 물기가 없도록 잠시 말린다. 파 한 벌에 소금 한 켜를 켜켜로 번갈아 깔아 다발을 만들어 항아리에 담고 맑은 물을 가득 붓는다. 아침저녁 물을 부어 매일 이렇게 물이 맑아질 때까지 바꾸어 주는데, 5~6월에 담가 두면 겨울이 지나도록 쓸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 파를 깨끗이 씻어서 적당히 소금으로 버무려서 나무통에 담고 2일을 두어 소금기가 다 배어들면 항아리를 볕이 드는 곳에 놓는다. 파는 다발로 만들어 넣는데 지저분하지 않은 것으로 꼭꼭 눌러 놓는다.” 이렇듯이 당시의 침채는 양념을 거의 넣지 않고 만들었다.
장계향(張桂香)의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서는 ‘생치딤채법(生雉沈菜法)’이 나온다. “오이지의 껍질을 벗겨 속은 도려내고 가늘게 한 치 길이만큼 도독도독 썰어 물에 우려 둔다. 꿩은 삶아 오이지와 같이 썰어 따뜻한 물에 소금을 알맞게 넣어 나박침채같이 담가 삭혀서 먹는다.” 오이지라는 채소절임이 들어갔기 때문에 침채법이라 했다.
유중림(柳重臨)의『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치포(治圃)」 ‘채명(菜名)’에서는 각 채소의 재배법과 이용법을 소개하면서, 당시 조선의 조리법을 속방(俗方)이라 적고 저 만드는 방법을 소개했다. 황과담저법(黃瓜鹹菹法)은 “늙지 않은 오이를 가져다가 꼭지를 떼고 깨끗하게 씻는다. 칼로 세 쪽에 칼집을 내어 고춧가루를 조금 넣고 또 마늘 4~5조각을 넣는다. 오이를 먼저 항아리에 넣는다. 오래 끓인 물에 소금을 넣고 아주 뜨거울 때에 오이에 붓는다. 항아리 주둥이를 단단하게 싸맨다. 그다음 날에 먹을 수 있다.”고 했다. 황과함저법(黃瓜鹹菹法)은 “늙지 않은 오이를 가져다가 깨끗하게 씻는다. 생강·마늘·만초(蠻椒)·부추·파의 흰 대 따위의 양념을 아주 가늘게 채 썬다. 깨끗한 항아리에 먼저 오이를 한 겹 넣고 그 위에 양념을 한 겹 넣어 오이가 다 없어질 때까지 차곡차곡 쌓는다. 오래 끓인 물에 소금을 타서 조금 짜게 한 뒤에 물이 뜨거울 때에 항아리에 붓는다. 볏짚으로 덮고 뚜껑을 닫아 놓았다가 이튿날에 먹는다. 이것은 여름철의 요리 방법이다.”고 했다.
홍석모(洪錫謨)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음력 10월에서 “서울 풍속에 만청(蔓菁)·송(菘)·산(蒜)·초(椒)·염(鹽)으로 옹기에 저를 담근다. 여름의 장과 겨울의 저는 곧 민간에서 일 년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고 했다. 김장을 하는 일을 저를 담근다고 했다. 이후 저는 침채와 김치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참고문헌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목은시고(牧隱詩藁)』
- 『사가집(四佳集)』
- 『산가요록(山家要錄)』
- 『설문해자(說文解字)』
-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 『시경(詩經)』
- 『여씨춘추(呂氏春秋)』
- 『주례(周禮)』
- 주영하,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