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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에 창건되어 조생이 주지로 있었으며,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절.

개설

인왕사(仁王寺)는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무학 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조생(祖生)이 경복궁 조성에 참여했다가 태조이성계의 신임을 받아 인왕사 주지가 되었고, 태조와 정종은 조생을 극진히 모셨다. 성종대까지 인왕사는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존속했으나 연산군이 궁궐을 내려다보는 곳에 있다는 이유로 철거를 명하였다. 현재의 인왕사는 근대에 복원한 것이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서울인왕산에 있던 인왕사는 ‘인왕(仁王)’ 혹은 ‘인왕(仁旺)’으로 표기하며 조선이 건국되고 도읍이 정해진 이후에 무학(無學) 대사(大師)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라고 한다. 조선 태조가 도읍을 정할 때 무학 대사가 인왕산을 진산(鎭山)으로 삼아 궁궐터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산은 나라의 도읍지나 각 고을 뒤에 있는 큰 산으로, 풍수지리에서 그것이 위치한 지역을 보호해준다고 하는 산이다. 하지만 정도전(鄭道傳)이 궁궐은 남면(南面)해야 한다고 반대하여 북악산을 진산으로 삼아 경복궁이 건설되었다. 이에 따라 무학 대사는 인왕산에 절을 건립하여 호국도량으로 삼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인왕산의 산 이름과 관련하여 후대의 기록에서, 인왕(仁王)은 석가모니의 다른 호칭이고 산 이름은 인왕사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라고(『광해군일기(중초본)』 8년 3월 24일) 한 것으로 보아 원래 산 이름은 인왕산이 아니었던 것 같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인왕산을 필운산(弼雲山)으로 고쳐 이름 지었다고 하였다. 즉 1537년(중종 32)에 온 명나라 사신이 인왕산이 경복궁의 오른쪽에 있으므로 ‘오른쪽에서 임금을 보필한다’는 뜻의 우필운용(右弼雲龍)에서 산 이름을 취하였다고 한다(『중종실록』 32년 3월 14일).

(2) 조선시대

인왕사는 태조가 도읍을 정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창건되었던 것 같다. 태조가 1397년(태조 6)에 인왕사를 방문하여 왕실 내의 불당 사무를 맡아보던 내원당감주(內願堂監主) 조생을 만났다는(『태조실록』 6년 3월 14일)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조생은 한양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을 새로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 승려들을 이끌고 와서 공사를 도왔으므로(『태조실록』 2년 11월 19일) 태조에게 신임을 받아 인왕사 주지에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1398년(태조 7)에도 태조가 인왕사를 방문하였는데 조생이 오대산으로부터 와서 임금을 맞이하였다(『태조실록』 7년 1월 21일). 이후에도 조생은 왕실로부터 존경을 받아 흥천사(興天寺)의 주지에 임명되었으며, 궁궐을 방문하고 떠나는 조생을 임금이 직접 배웅하기도 하였다(『정종실록』 1년 8월 12일).

조선초에는 인왕사의 승려들이 경복궁 내에 있던 내원당의 불사를 주관했다. 내원당에는 10여 명의 승려들이 소속돼 있었는데, 인왕사의 승려들이 정기적으로 궁궐을 출입하며 내원당의 불공과 법회 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대에는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김승경(金升卿)이 인왕산에 있는 복세암(福世庵)과 인왕사는 경복궁을 내려다보고 있고 선왕이 창건한 사찰이 아니므로 철거해야 한다고 상소하였지만 성종이 윤허하지 않았다(『성종실록』 18년 6월 2일). 이 내용에서 볼 때 성종대의 대신들은 인왕사의 창건이 왕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1503년(연산군 9)에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복세암·인왕사·금강굴(金剛窟)을 철거하라고 명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11월 9일). 이후로는 인왕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3) 근대

인왕사가 복원되는 것은 1912년에 재가자 박선묵(朴銑黙)이 인왕사 옛터에 선암정사(禪巖精舍)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이후 인근에 1914년에 탄옹(炭翁) 화상이 대원암(大願庵)을 세우고, 1922년에 서옹(西翁) 화상이 극락전을, 1924년에 비구니 자인(慈仁)이 안일암(安逸庵)을, 1927년에 춘담(春潭) 화상이 또 다른 극락전을, 1930년에 비구니 묘법(妙法)이 치성당(致誠堂)을 각각 세움으로써 여러 암자와 전각이 한 군락을 이루었는데 1942년에 이 암자와 전각들을 통합하여 인왕사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사찰문화연구원, 『전통사찰총서 4 : 서울』, 사찰문화연구원출판국, 1994.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 황인규, 「인왕사와 무학대사」, 『한국선학』22, 한국선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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