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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35 기준 최신판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이 관내에 머물며 수학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식당 이용자에게 점수를 주어 관시(館試) 응시 자격을 주던 제도.

개설

원점(圓點)은 고려시대 국자감을 운영하면서 3년 재학 기간 동안 300일을 기숙하도록 했던 원칙을 이어받아 성균관 학생이 기숙사에 머문 날을 점수로 표현한 것이다.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번 식당에 들어가서 서명을 하면 원점 1점을 획득하였다. 300점을 획득해야 문과의 예비 시험인 관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 점수를 채우지 못하면 한성시나 향시에 응시해야 하며, 그 경우에도 원점이 요구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원점법은 고려시대의 국자감 의무 재학 규정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건국 초 성균관의 정원을 200명, 최대 기숙 인원을 100명으로 낮추었음에도 한양의 집안 좋은 자제들이 기숙사 생활이 불편하다고 꺼려 성균관에 기숙하며 공부하는 유생의 수가 30~40명 미만이었다. 문과의 예비 시험 중 성균관 유생들끼리만 치르는 관시의 정원 50명에도 미달하였던 것이다. 이에 유생들이 성균관의 기숙사에 머물면서 공부하도록 만들기 위해 원점제도가 시작되었다.

유생이 기숙사에 머무는지 확인하는 방법으로 식당에서 한 식사를 활용하였다. 유생은 식당에 들어가면 식당에 비치한 도기(到記)라는 명부에 붓 뚜껑으로 도장을 찍게 하고, 아침·저녁의 두 끼를 모두 먹어야 1점을 주었다. 관시에 응시하려면 원점 300점을 취득해야 했고, 생원으로서 관시가 아닌 향시에 응시하려는 자도 200점을 채워야 했다[『태종실록』 17년 윤5월 14일].

변천

원점제도는 태종대부터 마련되어 세종을 거쳐 성종에 이르는 시기에 보완되었다. 처음에는 그 실시가 철저하지 못하였다. 예컨대 여러 사람이 다 아는 늙고 병든 사람의 아들은 원점을 획득하지 않고도 문과 향시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또 기숙사에 머물지 않으면서 대리 서명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1487년(성종 18)에는 원점법을 강화하였다. 즉, 성균관 관원 1명과 양현고 관원이 식사 인원수와 도기의 인원수가 일치하는지를 직접 확인한 뒤에 도장을 찍어서 봉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허위로 원점을 획득한 자, 대신 서명해 준 자에게는 3년간 과거를 볼 수 없는 정거(停擧)의 불이익을 주었다[『성종실록』 18년 12월 6일].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의 원점제도 시행으로 군·현 향교에 교관인 교도(敎導)에 제수되던 생원·진사가 대거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어 향교 교관인 훈도의 충원이 어려워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원점제를 완화하여 성균관에 재학하는 생원·진사에게 4서 2경의 시험을 보여 교도로 파견하고, 이들에게는 원점을 요구하지 않았다. 또 식년시가 아닌 별시 문과에도 원점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렇게 원점을 채우지 않아도 되는 예외가 많아져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이 줄어들자 다시 규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성종실록』 8년 11월 18일]. 또 성균관에 머문 지 여러 해가 되어 늙도록 급제하지 못한 유생을 위해 예조(禮曹)에서 월강(月講)을 상고하여 원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경직(京職)에 제수할 수 있는 길도 열어 주었다.

원점제가 성립하자 왕이 성균관 시학(視學) 후 시험을 보일 때나 명경과를 보일 때도 원점으로 응시 자격 기준을 삼았다. 또 최대 기숙 인원인 상양수(常養數) 100명 이외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따로 도기를 두어 원점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원점을 요구하지 않던 별시 문과도 학문의 진작을 위해 원점을 요구하는 쪽으로 운영의 묘를 발휘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22년 3월 15일]. 1534년(중종 29)에는 좌의정한효원(韓效元) 등이 단순히 성균관의 기숙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넘어 실지로 청강(聽講)을 하는 날만 원점으로 인정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권학절목」을 보고하기도 했다[『중종실록』 29년 11월 9일]. 1544년(중종 39) 『대전후속록』에는 향시·한성시에 응시하는 데 원점 150점을 획득해야 한다는 규정이 정해졌다.

원점법은 조선후기에 완화되어 갔다. 영조는 성균관 기숙사에 머무는 자, 즉 거관자(居館者)가 다 시골 유생이고 기숙사생 가운데 임원으로 뽑힌 유생[齋任]은 기숙사[齋舍]에 들어간 적도 없다는 것을 알고 매우 잘못되었다고 여겨, 과거에 응시할 생원·진사는 원점 15점을 채운 뒤에야 과거에 나아가도록 명하였다[『영조실록』 4년 7월 11일].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태학지(太學志)』
  • 이원재, 「조선 전기 성균관 원점법 운영의 비판적 검토」, 『한국교육』31권 3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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